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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한글로 먹고사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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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몇 년 전 미국 연수 시절의 한 장면이다. 그때 샌디는 “미국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본인도 영어밖에 못하면서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속 좁은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영어면 다 되는데 굳이 다른 나라 말 배울 필요 있느냐’며 자랑하는 거 아니냐는. 괜히 심통이 나기도 했다. 영어·중국어·일본어 다 배워야 겨우 먹고사는 한국인들의 애환을 너희 미국인들이 어찌 알겠느냔 생각에.

해마다 한글 주간이면 그때 일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꿈을 꾼다. ‘한글로 먹고사는 세상’이다. 세계인이 한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그래서 한국 땅에 태어난 것, 한국어를 하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사는 세상 말이다. 물론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경제·문화 쪽 한류가 그것이다. 그러나 충분치 않다. 다른 돌파구는 없을까. 있다. 특허가 좋은 예다.

요즘 특허 관련 업무를 하는 이들은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단다. “세종대왕님 고맙습니다. 한글 덕에 잘 먹고삽니다.” 그도 그럴 만하다. 일감이 늘고 있어서다. 특허청은 올해 심사관 69명을 새로 뽑았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외국 기업들의 조사 요청이 몰렸기 때문이다. 2005년 20건이던 국제조사 요청은 지난해 1만3978건으로 급증했다. 견디다 못한 특허청은 조사료를 대폭 올렸다. 2년 전 건당 평균 244달러에서 지난해 609달러, 올 초 다시 1092달러로 인상했다. 2년 만에 거의 다섯 배로 올린 셈이다. “비싸니 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올 8월까지 9155건이 몰렸다. 이미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많다. 특허청 관계자는 “4년 전 미국 특허청이 국제특허를 낼 때 한국 특허청 조사를 꼭 거치도록 하면서 의뢰가 몰리고 있다”며 “지난해 조사료로 번 돈만 9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들도 호황이다. A법무법인 변리사는 “4년 전에 비하면 일도 10배, 매출도 10배, 직원도 10배로 늘었다”고 말했다. 특허정보검색서비스업체인 윕스는 올해 직원 30여 명을 새로 뽑았다. 윕스의 이형칠 대표는 “창업 11년 만에 세계 5대 특허검색서비스업체가 됐다”며 “한글 특허 덕분”이라고 말했다.

‘특허 대한민국’의 일등공신은 정보기술(IT) 기업들이다. 세계 시장을 장악하면서 쏟아낸 특허·논문이 효자가 됐다. 한 특허소송 전문변호사는 “예전엔 특허 소송이 붙으면 미·일·유럽만 뒤지면 됐지만 요즘은 한국 기술문헌 검색이 필수”라며 “안 그랬단 큰 손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국적 제약회사 A가 좋은 예다. 5년 전 A사는 신약 특허를 전 세계에 동시에 냈다. 그런데 한글로 된 논문 한 편 때문에 사단이 났다. 한국 K대학교 석사논문에 관련 특허가 이미 실려 있었던 것. A사는 특허 출원비 수십억원과 신약 개발비 수천억원을 날려야 했다. 그 후 다국적기업들은 아예 특허를 낼 때부터 한글 문헌을 뒤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특허청에 563건의 조사를 의뢰했는데 그중 약 20%가 한글 문헌 조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한글로 먹고살 거리가 수십·수백 개로 늘어야 한다. 그게 두뇌강국 한국의 살길이요, 한글이 살길이다. 그런 세상이 오면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다. 미국인·유럽인·중국인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며 유머 한마디를 던지는 거다. “한 가지 언어밖에 못하는 사람은?” 답은 물론 ‘한국인’이다. 한글 주간에만 가능한 상상일까.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