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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글쓰는 작가 안타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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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어느덧 원로가 됐다. 뒤돌아 보니 30년이다. 우리네 문학이 좋아 무작정 뛰어든 일. 영문학자가 우리 문학에 빠져 산 지 서른 해가 지났다. 그 동안 남들은 뜻모아 잡지를 내기도 하고, 분파를 일으켜 다른 분파와 언쟁도 벌였다.

하지만 그는 늘 혼자였다. 조용히 책을 읽고 묵묵히 글을 썼다. 이태동(66)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런 사람이다. 1976년 등단한 뒤로 열편이 넘는 논문.평론집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해 왔지만, 여태 구설에 한 번 오른 적 없다. 그가 지난 세월의 글 가운데 고르고 골라 평론선집 '나목의 꿈 - 한국 현대소설의 지평'(민음사)을 펴냈다. 이상부터 최인훈.황석영.신경숙까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25명의 평이 실려있다.이 교수는 "지난해 2월 정년퇴임하자마자 매달렸다"며 "내년엔 시평론 선집을 낼 생각"이라고 밝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단(剛斷)이 묻어났다.

-나목의 꿈. 평론집 제목으론 꽤 문학적이네요.

"책에 실린 박완서론의 제목에서 따왔지요. 소설에서 '나목'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강인한 생명 자체와도 같습니다. 그 끊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지는 생명력은 바로 한국 문학의 전통이기도 하고요. 제목을 이렇게 붙였더니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참 좋아합디다."

-한국 문학의 전통에 대해 더 설명해주신다면.

"판이한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작가들에겐 하나같이 민족고유의 정서 같은 게 흐르고 있습니다. 오정희에서 김동리의 샤머니즘을 읽고, 이상에서 느꼈던 감상이 김승옥에서도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이론에서야 사실주의니 상징주의니 하고 구분하지만 밑바탕엔 공동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 걸 난 생명력, 또는 생명에 대한 의지라고 부릅니다."

-문학 비평이란 무엇일까요.

"연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악보(텍스트)를 보고 연주(비평)해 청중(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연주가 잘못되면 원곡을 망치게 되죠. 반면 훌륭한 연주는 원곡의 가치를 최대한 높여줍니다. 이런 이유로 비평은 작가의 의중을 읽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황순원의 사상적 전통을 이상에서 찾았을 때 작가가 전화를 걸어와 '고맙다'고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장감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글이란 건 무릇 생생한 삶의 경험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머리로만 글을 생산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작가 생명이 짧아지는 경향도 공부가 게을러서입니다. 작가는 평생토록 공부해야 합니다. 독일 문호 괴테가 '파우스트'를 쓴 게 환갑의 나이였습니다."

영문학자의 비평답게 평론집엔 숱한 서양 이론이 인용된다. 그러나 책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문장은 평이하고 논리 전개는 명징하다. 이에 대한 원로학자의 답변은 참 소박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굳은 다음에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어서…."

글=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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