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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45. 피란시절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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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84년 영화 '비구니' 촬영 스태프들이 한국전쟁당시 피란 장면을 찍고 있다.

고향인 평양에 살던 우리 가족은 1945년 광복 후 서울로 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대대로 대지주 집안이어서 공산정권 아래서는 버텨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평양 서천에서는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양조장.정미소.양말 공장에 운수업까지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 '태원(泰元)'이가 된 사연도 재미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금광에 투자했다. 노다지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을 계속 쏟아붓는데도 좀처럼 광맥이 나오지 않아 나중에는 자금난을 겪게 됐다. 이전에 아버지는 평양 기생집을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그 곳에서 한 여성을 흠모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를 사이에 두고 당시 평양 시경국장이던 일본인과 연적(戀敵)이 됐다. 식민지 시절이라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일본인 경찰관의 위세를 당할 수가 없었다. 애모하는 여성을 일본인에게 뺏기기 싫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몰래 그녀를 불러냈다. "내가 기생집에서 빼내 줄 테니 평양을 떠나게나." 아버지는 거금을 기생집에 줬다. 그녀는 중국 하얼빈으로 건너가 식당을 차렸고 몇 년 뒤 엄청난 돈을 모았다.

어느 날 그녀가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냈다. '금광 사업이 안 풀려 어렵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약소하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용기 잃지 마시고 사업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쓴 쪽지와 함께 상당한 금액을 부쳐왔다. 이 자금 덕분이었는지 아버지는 마침내 노다지를 발견했다. 그 해에 내가 태어났다. 이 금광 이름이 '평원 광산'이어서 돌림자인 '태'에 '평원'의 '원'자를 붙여 내 이름을 '태원'으로 지었다는 얘기를 삼촌들에게서 들었다.

아무튼 서울역 뒤쪽 갈월동에 집을 마련한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만큼 갑부 생활은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당시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했다. 내 친어머니는 아버지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두 형을 데리고 아버지 집 근처에 따로 집을 얻어 살았다. 2년 뒤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우리는 '큰어머니'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초기에는 피란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집에 지하실이 있어 공습경보가 울리면 모두 그 곳에 몸을 숨겼다.

석 달 뒤 미군이 인천상륙을 감행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9.28 서울 수복 작전이었다. 갑자기 집 근처에 포탄이 터지면서 인근 가옥들이 날라가는 바람에 일대가 폐허로 변했다. 집을 뛰쳐나온 우리는 평소 배운 대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 엎드렸다. 기관총과 곡사포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한 친척은 파편에 다리를 다쳐 나중에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내 왼쪽 팔뚝에도 작은 파편이 박혔다. 그러나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허겁지겁 언덕길을 기어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위를 올려다봤다. 새파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순간 공포감이 사라지면서 뭔가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사람이란 이렇게 죽는구나. 좀 더 살고 싶은데….' 어린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38선이 뚫리자 작은 형과 나는 평양에 있는 작은 이모 댁을 찾아가기로 했다. '큰어머니' 밑에서 눈치밥을 먹는 게 싫었던 것이다. 당시 큰형은 1사단 본부에서 군무원으로 일했다. 우리는 큰형이 모는 지프를 타고 평양 입구인 대동강 근처까지 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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