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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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가 그 무렵에 애쓰던 '드러내지 않기' 또는 '돌려서 말하기'는 모든 지식이나 체험은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삶다운 모양과 틀을 갖추게 되며 상대방까지도 의사 소통의 방법을 더욱 깊숙하게 더욱 새롭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것은 내 글쓰기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주관적 감정의 절제를 유지하면서 구성과 서사를 통하여 생각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되었다. 이를테면 '그립다 그리워 그리움' 따위의 단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장면과 상황이 훨씬 중요했다. 비어 있는 역사, 철길 위에 비가 오고 있다, 플랫폼의 계단 아래 한 아이가 서있다, 그 웅크린 팔꿈치 안의 비닐 우산.

또는 훨씬 뒤의 일이지만 이런 일화도 있었다. 러시아 문학도 최대진이가 초등학교 교사로 다니는 어머니에게서 학자금과 숙식비를 받아 그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불암산 근처 동네에서 농가의 방 한칸을 빌려 자취하던 무렵이다. 마당도 넓고 뒷동산의 소나무 숲 또한 장하여 시내에서 오글거리며 돌아다니던 몇몇이 차례로 냄새를 맡고 그리로 기어들었다. 농가의 대문 한 옆으로 따로 지은 별채였는데 비록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블록 집이었지만 부엌도 따로 있었고 방도 그야말로 운동장만 했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넣어두는 벽장이 어찌나 널찍하고 쾌적했던지 성진이는 낮잠을 자려면 어두컴컴한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네 활개를 펴고 잤을 정도다. 게다가 별채 바로 뒤에 높다란 밤나무가 서있어서 그 빽빽하게 자란 잎사귀들이 지붕 위에 짙은 그늘을 드리워 방안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의 널찍한 창문 바로 아래는 넓은 텃밭이 펼쳐져 있어서 철마다 다른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갈곳이 없던 성진이가 제일 먼저 대진이 자취방으로 들어갔고 뒤를 이어 현일이와 내가 기어드니 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차례로 들락날락했다. 그냥 가기는 미안하니까 집에서 쌀말이나 퍼다가 배낭에 짊어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쌀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다가 다른 녀석이 슬그머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양식이며 반찬거리들을 장만해 왔다. 어쩌다가 착실한 대진이가 러시아 소설을 번역한 원고료를 받아서 두부나 생선, 돼지고기 반 근에 소주라도 몇병 사들고 들어오면 그날 저녁은 잔칫날이었고 대개는 이튿날 아침까지 모두들 기분이 느긋했던 것이다. 아침에 밥 지어먹고 내다보니 바쁘지 않은 공일날에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성진이가 제안을 했다.

-야 이런 좋은 날 아침에 그냥 돼지처럼 처먹고 자빠져 있을 수가 있것느냐. 우리도 문화행사 좀 하자꾸나.

-제발 너의 그 야만적인 오페라 아리아는 삼가 주라.

-아니, 오늘은 백일장을 열지.

성진이의 말에 영자 잡지의 경제면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일이가 대꾸했다.

-제목을 '현금'으로 정하면 상상력이 조금 발동될 듯한데.

그때에는 성진이처럼 그림을 그렸고 나중에 시를 쓰다 그만둔 부잣집 아들 민기가 말했다.

-그래, 우리도 정서 좀 잡아보자. 제목을 '봄비'로 하는 게 어떨까?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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