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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엘시스테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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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8세기 이탈리아의 수상(水上)도시 베네치아엔 물만 많았던 게 아니다. 고아원도 수두룩했다. 자유분방한 성(性) 문화로 인해 버려지는 사생아가 워낙 많았던 탓이다. 여자 고아원만 네 곳이나 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가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고아원이다. 이곳에선 고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음악 교육에 중점을 뒀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 고아원에서 자란 소녀들의 3분의 1 정도가 놀라운 음악적 수준에 올랐을 정도다. 이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음악교사는 다름 아닌 ‘사계(四季)’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였다. 사계를 연주하며 고아들은 역경을 희망으로 바꿨음 직하다.

한국판 ‘피에타 오케스트라’도 있다.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다. 불우한 청소년들이 음악을 통해 꿈을 키운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이 오케스트라가 비발디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건 우연만은 아닐 터다. 지난 2월 세계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인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기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세종문화회관이 지난 7월부터 운영하는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도 음악을 매개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자신감과 의욕을 갖게 하려는 프로그램이다. 저소득층이나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모아 무료로 연주를 가르친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층 청소년을 위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가 모델이다. 엘 시스테마 사업은 1975년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차고에서 길거리 아이 11명에게 무료로 악기를 나눠주고 연주를 가르치는 데서 시작했다. 35년이 흐른 현재 전국에 200개가 넘는 청소년·유소년 오케스트라가 운영 중이며 30여만 명의 청소년이 거쳐갔다.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삶의 목표를 갖게 하고, 그들을 폭력과 범죄에서 구했다는 평가다.

엘 시스테마 창설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71) 박사가 제10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음악은 폭력과 마약, 성매매, 나쁜 습관 등 아이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모든 것을 막아주는 제1의 예방책”이라는 그의 말이 새삼 가슴을 울린다. 우리나라 초·중·고 학생의 24%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주·도박·자살·가출 등 위험행동에 노출돼 있는 ‘위기학생’이란 소식이 있고 보니 더욱 그렇다.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 같은 한국판 엘 시스테마 확산이 절실하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