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젊은 무용가 ‘뉴욕 등용문’ 만든 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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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77년 24살의 무용가 지망생은 부산 해운대 백사장을 말없이 걸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곤 단돈 240달러를 쥐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입양돼가는 아기를 안고서였다.

33년이 지난 지금 그는 미국 뉴욕에서 가장 주목 받는 무용가이자 안무가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섰다. 뉴욕을 대표하는 5대 무용축제 중 하나인 ‘덤보 댄스 페스티벌’의 총감독 김영순(57·사진)씨 이야기다. 김씨가 시작한 이 축제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23~26일 브루클린 곳곳에서 펼쳐지는 축제엔 미국은 물론 아시아·유럽에서 120여 개 팀, 1000여 명의 댄서가 참가한다.

덤보(DUMBO)는 ‘다운 언더 맨해튼 브리지 오버패스(Down Under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다. 맨해튼 다운타운의 야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브루클린 강변 지역을 가리킨다. 맨해튼 다리와 브루클린 다리 사이 동네로 10여 년 전만 해도 폐쇄된 공장이 흉물스러웠던 곳이었다. 그런데 맨해튼의 비싼 생활비를 견디지 못한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제2의 소호(맨해튼 남부의 한 지구로 예술·패션의 중심지)’로 떴다.

김 감독이 덤보에 정착한 것도 예술가들이 막 모여들기 시작한 2000년이었다.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를 장학생으로 마친 다음 뉴욕 10대 무용기획사의 하나였던 ‘스론’에서 활약하다 독립한 뒤였다. 88년 ‘화이트 웨이브 라이징 김영순 무용단’을 창단하긴 했으나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기에 맨해튼은 버거웠다. 덤보의 허름한 창고에 둥지를 튼 그는 어느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친구와 만났다. 그는 브루클린 아트센터가 기획 중이던 ‘덤보 아트 축제’ 중 댄스 부문 기획을 맡고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던 친구는 김 감독에게 그 일을 맡아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 인연으로 2001년 제1회 덤보 댄스 페스티벌 총감독을 맡게 됐다.

첫 해엔 브루클린에서 활동 중이던 동네 댄스팀 18개가 참가한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페스티벌의 수준은 올라갔다. 이미 김 감독이 뉴욕 무용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무용수였던 데다 스론에서 쌓은 안무 실력까지 발휘했기 때문이다. 참가팀이 늘자 브루클린은 물론이고 뉴욕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후원금도 쌓였다. 허름했던 그의 스튜디오는 존 라이언이란 독지가의 지원으로 80여 석을 갖춘 무용 전용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덤보 댄스 페스티벌이 뉴욕의 대표 축제로 성장하자 그는 2004년 겨울 무용 축제인 ‘쿨 뉴욕 댄스 페스티벌’을, 2006년엔 ‘웨이브 라이징 시리즈’라는 무용 축제를 잇따라 출범했다.

23일(현지시간) 2010 페스티벌 개막 행사로 열린 갈라 쇼엔 8개팀의 공연이 펼쳐졌다. 이탈리아에서 참가한 엔조 첼리는 “덤보 댄스 페스티벌은 세계 각국 젊은 댄서가 뉴욕에 데뷔하는 등용문”이라며 “브루클린 곳곳에서 공연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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