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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올레길 3년, 스위스에도 길을 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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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이달 말까지 스위스에 제주 올레길 5개가 놓인다. 체르마트 올레길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이 길에 세워진 ‘간세’를 잡고 활짝 웃고 있다. 뒤에 보이는 흰색 기슭 이 마터호른(4478m) 능선을 따라 이어진 빙하다.

스위스에 올레길이 생겼다.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면 뜬금없는 소리라고 고개부터 저었을 일이다. 하나 정말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52) 이사장은 지난 3일 스위스의 관광도시 라보(Labaux)에 ‘간세’를 세웠다. 간세는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 방언)에서 따온 말로, 제주 올레 길목마다 서 있는 조랑말 형상의 올레 이정표다. 올레꾼(제주 올레를 걷는 사람)은 오로지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간세는 올레의 영토를 표시하는 일종의 국경이다.

스위스에 간세를 꽂았다는 건, 제주 올레가 저 멀리 스위스 땅에도 생겼다는 얘기다. 불과 3년 만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보 여행지로 떠오른 제주 올레가 드디어 스위스에 진출한 것이다. 그 현장에j도 있었다.

j는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스위스가 자랑하는 하이킹 코스를 일주일 동안 걸으며 제주 올레가 스위스에 간 까닭을 들었다.

라보·체르마트(스위스) 글·사진=손민호 기자

● 스위스에서 뵙게 되니 더 반갑습니다.

“맨 처음 구상할 때부터 올레는 제주도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었어요. 뭍에서 제주도로 내려와 올레를 걷기 바랐고, 더 나아가 세계인이 제주 올레를 걷는 걸 꿈꿨어요. 제가 고향에 내려가서 길을 내겠다고 결심한 게 산티아고 길을 걸은 다음이잖아요. 길이 길을 낳은 셈이지요.”

(※서명숙 이사장은 전직 언론인이다. 2006년 9월 직장을 팽개치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홀연히 떠났다. 800㎞ 순례길을 걷고 난 뒤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 올레길을 내기 시작했다.)

● 자초지종이 궁금합니다.

“지난해 말쯤 스위스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스위스에 제주 올레를 내고 싶다고. 그래서 올봄 두 나라에 우정의 길을 내기로 협정을 맺었고, 7월 제주도에 먼저 ‘스위스-올레 우정의 길’을 냈어요. 바다가 좋은 10번 코스를 우정의 길로 골랐죠. 스위스는 바다가 없잖아요. 7월 행사 때 스위스 대사도 내려왔고, 스위스관광청 부사장도 스위스에서 날아와서 올레를 걸었어요. 이번엔 우리가 스위스에 올레길을 낼 차례가 된 거예요.”

● 스위스와 제주 올레가 공동 협력을 하면 스위스에만 유리하지 않을까요. 한국인은 스위스에 많이 가는데, 스위스 사람은 한국에 그만큼 안 오잖아요. 한국 시장을 노린 스위스 정부의 마케팅 수단으로 보이는데.(※스위스의 한 해 해외관광객 수는 약 1600만 명이고, 이 중에서 약 1%인 16만 명이 한국인이다.)

“사실 스위스와 협약을 하기로 결심한 건, 스위스에서 배울 게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스위스는 관광선진국이잖아요. 그 관광대국의 시스템을 배우고 싶어요. 스위스 면적이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라는데 하이킹을 위해 낸 길만 해도 6만㎞가 넘는대요. 우리가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것도 어찌 보면 놀랍지 않아요? 스위스에서 올레를 안다는 게 신기하지 않으세요? 공무원들이 일사천리로 일하는 속도도 부럽더라고요. 제주도에선 공무원하고 일하려면 복잡해서 속 터져요. 해주는 건 없으면서 간섭은 뭐 그리 많은지….”

● 여기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

마터호른 아래 호숫가에서(위). 아래 사진 두 장은 라보 포도밭에서다. 맨 아래 사진 뒤편에 보이는 파란물이 레만 호수다.

“8월 31일 들어왔고, 스위스에서 약 20일간 머무를 계획이에요. 모두 5개 도시를 방문하는데 도시마다 제주 올레를 내기로 했어요. 라보부터 체르마트·인터라켄·베른 그리고 루체른. 스위스는 길을 다섯 개나 내주는데 우리는 하나만 준다고 해서 스위스 쪽이 조금 섭섭한가 보더라고요. 그래서 하나 정도 더 내줄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j가 함께한 일정은 라보와 체르마트 지역이다. 유럽에서 둘째로 큰 호수인 레만(Leman) 호숫가의 작은 도시 라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포도밭으로 유명하고, 체르마트는 마터호른(4478m) 기슭에 들어선 세계적인 산악 휴양도시다. 두 도시에선 지방 관광청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간이 행사를 열었고, 스위스 정부 차원의 공식 행사는 다음 주 베른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직접 둘러보니까 어떠세요.

“다 부럽죠. 라보 포도밭은 한국의 다랑논처럼 생겼잖아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가파른 산기슭에서 흘린 농부들의 땀방울이 이 장엄한 풍경을 일궈낸 거잖아요. 더 놀라운 건, 이 포도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라보 주민이 똘똘 뭉쳤다는 사실이에요. 거대 자본이 일대 포도밭을 개발하려고 드니까 주민들이 ‘포도밭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개발을 막을 수 있겠다’고 묘안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는 거예요. 체르마트도 굉장한 곳이에요. 이 마을 안에선 오로지 전기자동차만 달릴 수 있어요. 탄소를 배출하는 일반 승용차는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요. 기차만 체르마트로 진입할 수 있어요. 승용차를 타고 왔다면 체르마트에서 기차로 12분 거리에 있는 타슈(Tasch)라는 마을에 차를 세워놓고 기차로 갈아타야 돼요. 체르마트에서 운행하는 모든 승용차는, 심지어 경찰차나 구급차, 택시도 이 마을에서 제작한 전기자동차예요. 전기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1억원이 훨씬 넘게 든대요. 이 모든 게 지역주민이 앞장서 쟁취한 전통이자 성공이에요. 해발 1620m의 고산 마을에 관광객이 너무 몰려드니까, 도로를 새로 닦고 주차장 새로 만드느니 차라리 차량을 막은 거예요. 놀랍지 않으세요?”

● 제주도에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도 얻었나요.

“가파도에 올레길을 낼 때 가장 걱정했던 게 있어요.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이 작고 예쁜 섬도 금방 망가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장님하고 상의한 끝에 가파도에 차를 실은 배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10-1 코스로 가파도 올레를 냈어요. 사실 지금 걱정되는 곳이 우도예요. 우도 올레(1-1 코스)가 올레꾼의 불만이 가장 많이 접수되는 코스예요. 올레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스쿠터 때문이에요. 우도에 차를 실은 배가 들어가잖아요. 우도에 차가 안 다녔으면 하는 바람인데, 여객선을 운항하는 사람도 우도 사람이어서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어요. 라보와 체르마트를 걸으면서 내내 우도 생각을 했어요. 두 마을 모두 주민이 앞장서 막무가내 개발을 막았잖아요. 좋은 방안이 없을까 궁리 중이에요.”

● 이번 스위스 일정을 제주 올레의 해외 진출 첫 사례로 봐도 될까요.

“사실 제일 먼저 연락이 온 건 일본이에요. 일본 시코쿠(四國)에 있는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오헨로 길이 제주 올레와 공동 발전을 위한 협약을 맺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난 3월 시코쿠에 가서 오헨로 길을 걷기도 했어요(중앙일보 week& 3월 19일자 1∼3면). 시코쿠 관광청하고 실무작업은 다 끝냈는데 MOU를 교환하는 행정 절차가 예상보다 길어지네요. 스위스가 첫 해외 진출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 제주 올레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스위스에 오면서 생각했더니 오는 17일이 제주 올레 3주년이더라고요. 물론 요란한 기념식 같은 건 없어요. 제주 올레 정신하고 맞지 않으니까요. 벌써 3년이 지났구나,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 올레도 어떻게든 달라지겠죠.”

● 처음 제주 올레를 구상할 때 지금과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요.

“자신은 있었어요. 세계 어느 관광지와 비교해도 제주도가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산티아고 길에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들지만, 산티아고 길도 제주도만큼은 아름답지 않아요. 다만 내 예상보다 그 기간이 짧았을 뿐이에요. 3년도 안 됐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제주 올레를 찾을 것이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 왜 이렇게 반응이 빨리 왔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굶주렸다는 뜻이겠지요. 이제껏 우리는 번잡한 관광에 너무 시달렸잖아요. 올레를 걷다가 바닷가에서 갯것을 보면 그걸 잡으며 놀면 되는 거예요. 그게 체험관광이잖아요. 문화와 자연을 경험하기 위해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가는 것도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이에요. 농촌마다 녹색체험 관광이라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사실은 다 ‘가짜’잖아요. 하지만 올레에선 모든 게 진짜예요. 두 발로 걸어서 자신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기 때문이에요.”

● 그럼, 지금의 올레 신드롬을 보면서 예상하지 못한 게 없었다는 건가요.

“하나 있어요. 제주도 사람들이 변했어요. 사실 올레길을 내면서 내심 걱정했던 게 있어요. 제주도 사람들은 상처가 많거든요. 늘 뭍사람을 경원했어요. 그래서 외지 사람에게 제주도 사람은 무뚝뚝하거나 불친절하게 보였어요. 제주 올레가 제주의 깊은 속살을 헤집고 다니잖아요. 개발된 관광지에선 훈련받은, 그러니까 대가를 바라는 미소가 생활이 돼 있지만 보통 제주 사람에겐 그렇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저도 놀랐어요. 제주 사람에게 이처럼 친절한 마음씨가 남아있을 줄 정말 몰랐어요. 올레꾼이 길을 잃으면 경운기로 태워주고, 끼니를 못 챙겨 먹었으면 밥을 나눠먹고, 잠잘 곳을 못 찾았으면 자기네 자식 방을 내주는 제주 사람 얘기를 올레꾼으로부터 들을 때마다 저는 정말 감동했어요. 여행지에서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사람이에요. 풍경은 사진을 봐야 그때의 감상이 떠오르지만, 사람은 사진이 없어도 잊히지 않아요. 그 소중한 사람의 추억을 지금 제주 주민이 올레꾼에게 선사하고 있는 거예요. 감사하고 뿌듯해요.”

● 올레가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구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없겠어요. 내가 올레를 내서 떼돈을 번 것처럼 떠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올레는 입장료가 없어요. 정부 지원금은 지도를 만든다거나 하는 사업에만 쓰이고, 기업 후원금도 간세를 세우거나 화장실을 들여놓는 사업에만 한정돼서 쓰여요. 모든 경비를 다 대주겠다는 대기업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지금도 그 원칙은 유효합니다. 사무국 직원이 지금 13명이에요. 제가 월급을 줘야 하는 사람이 13명이란 뜻입니다. 하나 그들 전부가 이전 직장에서 받았던 월급의 절반도 못 받고 일하고 있어요. 그들을 언제까지 푼돈 줘가며 쓸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돈 한 푼 못 받고 자원봉사에 나선 제주 주민에겐 늘 송구한 마음뿐이에요. 개인 후원금이 떳떳한 수입으로 그나마 유일한데, 아직 살림이 펴일 만큼은 못 돼요.”

● 아예 수입이 없는 겁니까.

“그래서 수익사업을 시작했어요. 자체 제작한 멀티 두건과 손수건, 그리고 간세 인형을 팔아요. 인기가 아주 좋아요. 뭍에서도 살 수 있게끔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인터넷 쇼핑몰 제안도 있었어요. 하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제주 올레 기념품은 제주도에 와서, 그것도 올레길에 와서만 살 수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 돈이 가장 큰 걱정이겠군요.

“돈은 별로 걱정을 안 해요. 내가 원래 셈에 약해요. 돈을 벌려고 길을 낸 것도 아니니까. 당장 걱정은 11월에 열릴 걷기 축제예요. 앞으로 해마다 축제를 열 거예요. 세계에서 사람이 찾아와 올레를 걷는 건, 내가 고향에 올레를 내겠다고 작정했을 때부터 꿨던 꿈이에요. 그 첫 결실을 앞두고 있어요. 설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길이 만나는 건 결국 길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또 다른 길이 있다. 길 내는 여자 서명숙과 제주도에서 걸었고, 일본에서 걸었고, 이번엔 스위스에서 걸었다.

걷고 보니, 길은 길을 만나 또 길이 되고 있었다. 올레길은 이제 더 이상 우리만의 길이 아니다.



j칵테일 >> 스위스 - 올레 우정의 길

스위스 정부와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지난 4월 서울에서 공동 발전과 협력을 위한 MOU를 교환했다. 7월 2일 토마스 쿠퍼 주한 스위스 대사, 마틴 니덱거 스위스 정부 관광청 부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 올레 10코스가 시작하는 화순해수욕장에서 ‘스위스-올레 우정의 길’ 선포식을 열었다. 제주 올레는 바다를 끼고 도는 10코스를 스위스-올레 우정의 길로 선정했고, 스위스 정부는 스위스의 베른·루체른·체르마트·인터라켄·라보 등 대표적인 관광도시 5곳에서 하이킹 코스를 골라 우정의 길로 내놨다. 두 나라의 우정의 길 어귀엔 제주 올레 이정표인 간세가 세워진다. 스위스 정부는 올해와 내년을 ‘걷기 여행의 해’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해외 홍보를 하고 있으나 외국과 길에 관해 협약을 맺은 건 제주 올레가 유일하다.

>> 제주 올레

올레는 원래 집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서명숙 이사장을 비롯한 사단법인 제주올레(www.jejuolle.org)가 2007년 9월 17일 첫 코스를 개장한 이래 현재까지 정규 코스 16개와 비정규 코스 5개를 합해 21개 코스의 제주 올레 길을 냈다. 총연장 길이는 347㎞. 제주도 성산읍의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주로 해안선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섬을 돌며 올레 길이 이어지는데, 현재 전체 제주도 해안선의 3분의 2 정도까지 올레가 나 있다. 제주 올레는 요즘 한국의 걷기 여행 판도를 이끄는 일종의 신드롬이다. 올레 신드롬은 제주도를 넘어 뭍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국 지자체마다 제주 올레를 본뜬 걷기 코스를 만들고 있고, 아예 ‘올레’란 이름을 빌린 길도 수두룩하다. 제주 올레 신드롬이 놀라운 건, 이 모든 성과가 정부의 도움 없이 민간단체가 이뤄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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