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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고시 독점’ 깰 대안은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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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상승의 기회를 박탈한 거다.”

행정안전부가 지난달 12일 행정고시 개혁안을 발표하자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 홍준표·정두언 최고위원 등 주요 인사들이 쏟아낸 비판이다.

행안부의 발표 내용은 간단했다. 행정고시 명칭을 5급 공채 시험으로 바꾸고 2015년까지 공무원의 절반을 공채로, 나머지 절반을 전문가 대상의 특채로 뽑겠다는 것이었다. 국회 행안위 소속 한나라당 간사인 김정권 의원은 “매년 공채 인원이 지금보다 30~40명 정도 주는 셈”이라고 추산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수도 있는 숫자이지만 ‘기회 박탈’이라며 호들갑을 떨 정도로 큰 수인지는 의문이다.

행안부 안이 행정고시 폐지를 의미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에선 “정부가 행시를 없앤다고 발표했는데 이걸 폐지하면 고려시대 음서제도를 부활하는 것”(홍준표)이란 주장이 강하게 표출됐다. 여당은 행안부 계획을 비판하면서 고시준비생의 입장을 대변했다. 안상수 대표는 “고시라는 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신분 상승 기회”라며 “행안부 안은 고시를 준비하는 많은 이들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당에서는 공무원의 고용주인 국민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伏地不動)’ 문제, ‘철밥통’ 문제 등을 고치고, 대(對)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정부를 만들기 위한 공무원 채용방안 개혁에 대한 진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고시 출신이 기수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고위 공직을 장악함에 따라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방안이 과연 무엇인지 모색하는 모습을 여당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행안부는 결국 여권의 압박에 백기를 들었다. 기묘한 건 결론이다. 정부가 항복한 셈인데 공무원들이 손해 보는 건 없기 때문이다. 매년 뽑히는 5급 공채 인원이 현재 수준(300명)으로 고정되는 반면, 특채 출신은 줄어들 수도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고시 독점주의는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행시 현행 유지로 공무원 사회에선 ‘공정사회’ 개념에 어긋나는 일이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점을 여당 지도부는 심각하게 성찰해 봐야 한다.

고정애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