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천안함 출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북한의 대북 쌀 지원 요청을 계기로 남북 간에 미묘한 기류 변화가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3월 천안함 도발 이후 연일 대남 비난과 도발 위협의 수위를 높이던 북한이 쌀을 비롯한 수해 구호·복구 물자를 달라고 나섰다. 적십자 채널을 이용했지만 남북 관계의 관행이나 북한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당국 차원의 공식 요청인 셈이다. 정부는 쌀 지원을 포함해 ‘긍정적 검토’를 하겠다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방향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공기는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대북 지원 문제를 매개로 ‘천안함 국면’이 바뀌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요청은 지난달 남측의 100억원대 구호물자 제공 제안에서 성큼 나아간 것이다. 쌀 등을 제외하고 라면 등 구호식량·의약품 등을 보내겠다는 한적의 제의에 4일 오후 대남 통지문에서 “제공할 바에는 비상식량 등보다 쌀을 달라”고 요구해온 것이다. 앞서 3일 정부 고위 당국자는 제주에서 한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차원에서 쌀은 어렵지만 민간단체의 쌀 제공 허용은 검토할 것”이란 언급을 했다.

이번 지원 요청은 북한의 다급한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신의주 등지의 수해는 발등의 불이다. 김정은 후계체제와 관련된 노동당 대표자회가 임박했다. 추석(9월 22일) 명절이 다가왔고 다음 달 10일에는 노동당 창건 65주년 행사가 잡혀 있다. 지난해 11월 말 화폐개혁 실패에 식량난 악화가 겹쳐 민심은 흉흉하다. 권태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북한의 곡물 생산은 400만t 내외로 추정돼 최소 소요량 520만t에 크게 부족하다”고 말했다. 올해 북한이 상업적으로 도입할 곡물이 20만~30만t에 불과하기 때문에 100만t 이상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국자들은 쌀 지원 검토가 대북정책 기조 변화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 원칙을 지키면서도 긴장을 줄이는 중장기적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의도 분석에도 부심하는 분위기다. 북한의 요청이 야당과 일부 민간단체의 대북 쌀 제공 여론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란 판단에서다. 북한이 납북된 대승호 송환을 지렛대로 정부를 압박하고 대북 지원을 둘러싼 남남 갈등을 확산시키려는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천안함 이후 남북 긴장상황을 관리하고 6자회담 재개 움직임 등 한반도 기류 변화에 대처할 남북관계 출구전략이 북한의 쌀 지원 요청을 계기로 마련돼야 한다는 여론에도 정부는 촉각을 세우고 있다.

◆정부, 북한 쌀 요청 늑장 공개=북한의 쌀 지원 요청 통지문을 정부가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통일부는 통지문을 사흘간 숨겼고, 6일 북한의 대승호 송환 결정을 설명하면서도 쌀 요청 대목은 브리핑하지 않았다. 수신인인 유종하 한적 총재에게 통지문 내용을 알리지 않은 점도 문제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7일 기자실을 방문해 “이런 일이 없도록 100% 노력하겠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