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배수진 공방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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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8보 (95~102)]
黑 . 이세돌 9단 白.구리 7단

배수진(背水陣)은 퇴로가 없는 곳에서 싸우는 어리석은 전법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의 명장 한신은 금기로 돼 있던 배수진으로 싸워 이긴다. 적을 이기지 않으면 살 길이 없음을 병사들에게 확연히 알려줌으로써 죽기로 싸우게 만든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전보에서 구리(古力)7단이 던진 백△에서 배수진의 각오가 그대로 드러난다. 칼을 높이 쳐들고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듯 보인다.

유리한 쪽은 이런 경우 대개 몸조심하는 쪽으로 나온다. 광기 서린 적의 칼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않는다. 배수진의 생문(生門)은 이렇게 열린다.

'참고도1' 흑1로 두면(이게 보통의 응수법이다) 백2로 끼워 8까지 깨끗하게 산다. 상변 A로 살아가는 수가 남지만 전체의 사활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귀의 임자가 바뀌면서 백이 바짝 추격하는 바둑이 된다.

이세돌9단의 응수는 95였다. 상대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칼날을 거두지 않는 신랄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이 장면에선 누구나 '참고도2' 백1로 젖혀 내 길을 가고 싶다. 배수진을 칠 때 각오했던 길이다. 그러나 구리는 8까지 두 점이 잡혀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96으로 버텨도 귀는 귀대로 맛이 있다고 본다.

귀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세돌의 101이 연이은 강수다. 유리하지만 떨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송두리째 거는 이세돌에게서 진한 핏빛 투혼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저러나 귀는 어찌 되는 것일까. 102로 젖혀 만약 이 귀가 살아버린다면 이세돌의 강수들은 한낱 고집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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