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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 못하고 정무적 판단도 부재, 외교부의 부끄러운 자화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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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호 06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딸의 특채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유 장관은 딸의 임용을 백지화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여론은 악화됐다. 강정현 기자

“아프게 때려 달라. 달게 받겠다. 할 말이 없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현선(35)씨의 특혜 채용 파문으로 사의를 표명한 4일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같이 말했다. 외교부의 당혹함과 침통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특히 젊은 외교관들 사이에선 “화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교부의 수장이 대외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나 실책이 아니라, 딸의 특혜 채용으로 사퇴하는 상황이 되면서 외교부는 허탈감에 빠졌다. 외교부의 수장이 대통령은 물론 정부에 누를 끼치고 국민으로부터 지탄받는 일을 함으로써 전체 외교관들의 이미지와 위상에 상처와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한 외교관은 “가뜩이나 외교부에 대한 대외 이미지가 좋지 않은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딸 특채 파문 이틀 만에 사퇴한 유명환 외교장관

靑, “G20 보다 공정한 사회가 더 중요”
유명환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원년 멤버다. 2년7개월을 재임한 최장수 장관이었다. 유 장관은 취임 첫해 터진 미국산 쇠고기 파동,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파동, 미국 국립지리원의 독도분쟁 지역화 사태 등으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겨왔다. 야당의 사퇴 공세가 나온 것도 수차례다.

설화로 무리를 빚은 적도 여러 번이다. 2009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선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민주당 천정배 의원을 향해 “여기 왜 들어왔어. 미친 ×”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고, 지난 7월 말에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ARF 직후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한 자리에서 “친북 젊은이들은 북한에 가서 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또다시 정치적 논란에 불을 지폈다. 당시 재·보선을 앞둔 야당은 유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며 맹렬한 공세를 폈지만 유 장관은 버텼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의 주무 장관이란 점이 야당의 공세를 비켜간 요인이 됐다. 지난 8·8 개각 때 유 장관이 유임된 데도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라는 과제에 따른 묵시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 장관이지만 이번 딸 특혜채용 사건 파문은 끝내 타넘지 못했다. 유 장관은 사건이 터진 이튿날인 지난 3일 해명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아버지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에 채용되는 것이 특혜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딸의 임용을 백지화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악화된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야당은 물론 인터넷 등에선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젊은이들의 댓글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등 시간이 갈수록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청와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강경 입장으로 선회했다. 당초 외교부가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자체 감사 방안을 제시했지만 이를 묵살하고 행정안전부에 전격 감사를 지시한 것도 청와대가 이번 사건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방증이다. 행안부는 유 장관 딸의 통상전문계약직 채용 과정에서 외교부가 법령을 위반하는 등의 특혜가 있었는지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언론 보도대로 외교부가 애당초 유 장관 딸이 어학 자격요건이 안 돼 나머지 6명까지 모두 철회시키고 재응모하게 한 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거나 거기에 협조한 관계자들은 범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느냐”는 말도 했다. 경우에 따라선 유 장관 개인의 사퇴에 그치지 않고 ‘줄 징계’가 내려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밝힌 ‘공정한 사회’ 구현이란 캐치프레이즈가 유 장관 사건으로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사건 발생 48시간이 안 돼 신속하게 매듭을 지은 건 그만큼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3일 오후 들면서부터 유 장관의 자진사퇴를 종용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다. 청와대와 유 장관은 수차례에 걸친 심야 조율을 거쳤고 4일 오전 자진사퇴 발표로 가닥을 잡았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4일 “G20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지만 (딸 특채 의혹이라는) 워낙 정서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터져 당혹스럽다”면서도 “행안부의 자체 감사 결과가 나오면 대통령이 최종 판단을 내리겠지만 결국 사의를 수용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핵심 관계자도 이 대통령의 사의 수용과 관련해 “대통령은 늘 민심의 한복판에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유 장관 딸 특혜 채용 파문이 이처럼 초스피드로 처리될 수 있었던 데는 시간을 끌다가 자칫 정부가 추진 중인 고시 제도의 개혁정책이 저항에 부닥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는 외무고시와 사법시험을 폐지, 각각 외교아카데미와 로스쿨 제도로 바꾸는 방침을 추진 중이거나 시행하고 있다. 최근엔 행정고시의 경우 2011년부터 5급 공채로 이름을 바꾸고 이 중 30%는 민간 전문가로 충원키로 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간 공직사회 충원의 근간을 이뤄왔던 3대 고시 제도가 폐지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다. 국제 환경의 흐름상 인재채용 방식도 다원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정책 방향에 대해 야당은 물론 여권 일부에서도 “현대판 음서제도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 장관 사건을 질질 끌 경우 반대세력과 특히 취업대란에 내몰린 청년층의 분노와 반발을 사게 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여야 정치권은 4일 “공정한 사회를 실천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이명박 정부는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을 모든 면에서 분명히 할 것이며, 공직자들은 솔선수범해야 할 것”(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이라거나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고위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한 데 대해 사퇴한 것은 적절한 선택”(민주당 전현희 대변인)이라고 말했다.

“자식의 일 앞에서 판단력 잃은 것 아닌가”
유 장관의 딸 특혜 채용 사건을 지켜본 인사들은 유 장관이 30년 넘게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더욱이 주류로 요직을 거쳐, 외교부 수장 자리에 오른 뒤 외교통상부란 조직을 사적 조직으로 쉽게 생각해버린 것 아니냐는 분석을 하고 있다. 한 외교관은 “공복으로 봉사해야 할 국가의 조직이란 사실을 망각하는 불감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에 ‘자식’의 일 앞에서 판단력을 잃어버린 부모의 모습도 보여줬다는 것이다.

현선씨가 1차 계약사원으로 처음 일한 때는 유 장관이 차관이던 시절이다. 현선씨가 통상교섭본부에서 근무한 2006~2008년 직원들의 평가나 정서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이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외교부 내 보좌 시스템, 내부 규율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이번 사건과 관련, 신각수 제1차관과 천영우 제2차관은 물론 대부분의 고위직 인사들은 현선씨의 계약직 채용 사실을 몰랐다. 한 고위 관계자는 “장관의 딸이 특별채용에서 그것도, 달랑 한 명을 뽑는 전형에 응모해 합격하는 것 자체로 엄청난 파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정치적·정무적 판단을 했어야 했다”며 인사를 담당한 기획조정실의 잘못을 지적했다. 채용 문제가 불거진 3일 오전 회의에선 신각수·천영우 두 차관이 임재홍 기획조정실장을 엄중 질책하는 등 분위기가 격앙됐다고 한다.

유명환 장관이 2년7개월간 최장수 재직을 하고 오는 11월 G20회의 때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기류에 들어서면서 조직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전반적인 근무 기강으로 이어져 이번 사태를 낳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유 장관은 외시 7기다. 올해로 외교관 경력 37년째다. 그러나 유 장관이 사적인 이유로 불명예 제대함으로써 그간의 경륜과 숙련된 외교력, 유연함 등 긍정적 평가들은 하루아침에 빛이 바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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