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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떠난 이윤기, 제대로 보내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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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게 당대의 문사(文士)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전부인가? 그의 사망 소식은 영결식 전날 포털의 검색어 1위를 지켰다지만, 고인에 대한 자리매김이 충분한 것 같진 않다. 그가 쓴 신화 책을 읽었다는 이는 꽤 많아도 소설이, 그의 문학작품이 새로웠다고 말하는 눈 밝은 이는 의외로 드물다. 이렇게 숭숭 구멍 뚫린 풍토에선 이름값이 곧 업적의 전부로 통한다. 소설·신화·번역 세 부문 중 어떤 성취가 이윤기의 몫이고, 한국문화에 대한 진정한 기여인가? 냉정하게 말해 그가 불 지핀 신화 붐의 경우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 초등생까지 신화 책을 읽게 한 건 일단 그의 공이 맞다.

하지만 그는 제우스·헤라클레스 이름을 외는 차원을 넘어 우리 신화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길 원했다. 당장 표준으로 통하는 그리스신화를 넘어 동북아신화 재발견까지 원했는데, 본인은 그 목표까지 이루진 못했음을 지적해야 한다. 어쨌거나 신화 붐에 치인 게 이윤기의 본령인 문학인데 신화가 꼬리라면, 문학은 몸통이다. 그에 대한 고인의 자부심도 컸다. 내가 아는 한 단편집 『나비넥타이』, 장편소설 『하늘의 문』은 우리말로 된 가장 세련된 문장이다. 근현대문학을 통틀어 그렇다. 유감이지만 대중적 저변을 확보하진 못했다. 지식인 소설을 지향한 탓도 있지만, 때를 못 만났다.

문학이 죽은 1990년대 이후 주로 작품활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질만으로는 염상섭·김동리·이효석으로 이어지는 현대산문의 장인(匠人) 반열에 속한다. 말만 요란했던 신세대문학의 와중에 정통소설의 바통을 이은 것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이고, 조금 위안이 되는 건 빛나는 번역문학의 유산인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등을 맛깔스런 우리말로 빚어낸 공로라니! 누구 말대로 해방 이후 번역은 이윤기 이전과 이윤기 이후로 확연히 갈릴 정도다.

그날 빈소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많은 조화 중 ‘카잔차키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름의 조촐한 꼬리표였다. 대표 이름도 없었지만 그래서 값졌다. 어쨌거나 이윤기의 세 유산 중 신화와 번역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와 인지도를 갖지만 ‘작가 이윤기’ 진면목에 대한 평가는 소홀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서둘러 보내는 게 유감이다. 곱새기지만 그는 우리말과 언어를 한 차원 높였던 진정한 마에스트로였다. 더구나 문자와 언어 유산을 소홀히 하는, 황량한 디지털 사막문화의 한 복판에서 이룬 성취다. 그 촘촘한 유산 점검이 우리 몫이다. 가버린 봄날은 다시 오기 때문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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