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친서민에 길을 물어라, 답은 미리 내놓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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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코란은 읽는 사람의 뜻대로 대답하는 법이오. 그대는 살육을 바라시오? 그럼 코란을 열어 그에 합당한 해답을 찾으시오. …다른 이가 열면 다른 대답, 즉 평화라는 해답을 얻어낼 것이나 둘 다 신이 내리시는 것이오.”

터키 총독의 일갈이다. 그러곤 참석자들에게 묻는다.

“그대의 의견은 무엇이오? 그대의 코란엔 뭐라고 쓰여 있소?”

경전(經典)의 가르침이란 결국 읽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일까. 이미 정해둔 답을 경전으로 정당화시키는 인간의 얄팍한 술수를 꼬집은 것일까.

종교처럼 큰 주제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우리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보면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이번 정부도 경전 비슷한 걸 모시고 있다. 바로 ‘친(親)서민’이다. 뭘 하자는 것도, 뭘 하지 말자는 것도 친서민에 묻는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8·29 부동산 대책이다. 실효성 여부를 떠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건드리는 게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걸 풀자, 말자 하는 근거가 모두 친서민이었다. DTI 탓에 집이 안 팔려 불편을 겪는 서민이 많다, 아니다 이걸 풀면 부자가 쉽게 돈 빌려 투기하므로 서민이 또 고통받는다. 똑같이 서민을 위한다면서 정부 내에서도 이렇게 엇갈렸다.

보금자리주택의 공급 속도를 조절한 거나 다(多)주택자 양도세 중과 면제 시한을 연장한 것도 그렇다. 보금자리주택을 계속 공급해 집값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친서민이다. 이게 한쪽 주장이었다. 반면 물량이 너무 많다 보니 기존 주택을 사려는 사람이 줄고, 그래서 집을 팔고 싶은 1주택 서민이 고통받는다. 이게 반대쪽 논리였다. 이렇게 다른 주장이 모두 친서민을 업었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면제 시한의 연장은 더 아슬아슬한 친서민 논리의 줄을 탔다. 시한을 늘려줘야 연말에 급매물 쏟아지는 걸 막는다, 그래서 시장이 살면 이게 돌고 돌아 결국 서민에게도 도움이 된다…. 이 주장이 ‘집 여러 채 가진 사람에게 혜택 주는 게 어찌 친서민이냐’는 반대론을 눌렀다.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시켜 거기서 생계를 꾸려가는 서민들의 살림도 피게 만들자, 이것이 정부가 주장하는 ‘친서민성’이다. 반(反)서민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대책들이 친서민의 세례를 받고 당당히 빛을 본 것이다.

이쯤 되면 8·29 부동산 대책과 친서민의 정합성(整合性)을 따져봐야 큰 의미가 없다. 친서민에 맞네, 안 맞네 까칠하게 목청 높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누구는 친서민이고, 누구는 시장주의다 하며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부질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래도 친서민, 저래도 친서민이다.

애초부터 친서민이란 말 자체가 좀 어색하지 않았나. 당연한 걸 자꾸 강조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친자유, 친민주라는 말은 잘 안 쓴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힘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위하는 건 정부의 당연한 임무다. 정부가 친서민이란 구호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를 부각시킨 건 ‘부자 정권’이라는 비판을 의식해서인 듯하다. 또 경기회복의 온기가 서민층에 전달이 채 안 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게 된 것도 친서민 구호의 등장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면에서 친서민은 처음엔 다분히 정치적 레토릭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아 시장주의자들을 긴장시켰다. 다행인 것은 이게 계속 깐깐하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슬슬 현실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령 있게 설득하면 융통성 있게 넘어가기도 한다. 부동산 대책도 그렇게 시민권을 획득했다. ‘교조적(敎條的) 친서민’에서 ‘실용주의 친서민’으로 변모하고 있다고나 할까.

앞으로 수많은 정책이 친서민에 길을 물을 것이다. 나름대로 답을 미리 내놓은 채 말이다. 그렇다면 뭘 하든지 친서민 편에 섰다고 포장하는 것이야말로 정책 담당자의 중요한 기술이 된다. 영혼이 없다는 공무원들, 서민을 위한 친서민보다 친서민을 위한 ‘친친서민’에 몰두할까 걱정이다.

남윤호 경제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