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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만 광년 떨어진 우주를 향해 매일 밤 별난 여행 떠납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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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20면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광덕산 자락. 계단식 논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니 왼편에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단층 ‘창고’ 건물이 나타났다. ‘별지기’들에겐 입소문이 난 ‘호빔 천문대’다. 둥근 지붕을 한 돔 형태의 전형적인 천문대를 생각했던 기자는 잠시 당황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30평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좁은 싱크대까지 둔 모습이 흡사 민박집 방이다. 건물 가운데로 난 문을 열고 나서야 ‘잘못 찾아왔나’하는 불안감이 가셨다.

낮엔 피자집, 밤엔 호빔 천문대 운영하는 황인준씨

10평 남짓한 공간에 직경 14인치 반사식을 비롯, 크고 작은 천체망원경 8대가 들어서 있다. 대부분 별의 움직임을 동시에 따라가면서 관측할 수 있는 자동추적 적도의를 장착한 전문 관측장비다. 장비 값이 모두 1억원을 넘어선단다. ‘방 안에서 별을 어떻게 볼까’ 하는 궁금증은 삼각형 지붕 아래에 달린 바퀴와 레일을 보고서야 풀렸다. 지붕을 한쪽으로 밀어 열 수 있는 ‘슬라이딩 루프(sliding roof)’식 천문대였다.

이 천문대의 주인 황인준(45·사진)씨는 자신을 ‘천체 사진가’로 소개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지붕을 열고 지구에서 23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와 같은 우주 속을 누비며 사진을 담아낸다고 했다. 1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다. 1년에 한두 차례 정도는 외국으로 나가 별을 본다. 몽골의 초원에서 개기일식을,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호주에서 남반구의 밤하늘을 촬영했다. 그의 홈페이지(www.astronavi.co.kr)에는 해·달·별 등 그간 촬영한 우주세계가 담겨 있다.

별을 제대로 보려면 인공 불빛은 물론, 구름과 달도 없어야 한다. 그 때문에 드물게 밤하늘이 깨끗한 날이면 별을 보다 새벽을 맞기 일쑤다. 황씨는 부인과 함께 딸 셋을 둔 가장이다. ‘걸핏하면 밤새우고, 장비 사면 뭘 먹고 사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황씨는 피자가게 사장님이다. 정확히는 별을 보기 가장 좋은 직업으로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자영업을 골랐단다. 낮에는 아산 시내 피자가게 사장을 하다, 해가 지면 논두렁 사이에 있는 천문대로 출근한다.

황씨는 원래 속세의 기준으로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학부는 일본 긴키대(近畿大) 경영학과를, 석사과정은 미국 링컨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마쳤다. 1995년 첫 직장으로 SK건설에 입사해 해외플랜트 영업을 담당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6년 뒤엔 온라인교육 벤처기업에 부장으로 영입됐고, 2003년엔 컴퓨터 관련 벤처기업 사장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기업경영은 인생을 걸고 정력을 투자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 꿈인 ‘별 보기’였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과학만화 잡지의 우주 편을 읽다가 별을 만났다. 중2 때부터는 우리나라 1세대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가 이끈 한국아마추어천문협회의 ‘별지기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고1 때는 부친이 사주신 당시 50만원짜리 천체망원경으로 본격적인 별 보기에 나섰다.

직장생활에 찌들어 한동안 별을 잊어버렸던 그가 다시 돌아온 건 2000년. 옛 친구가 선물로 준 적도의가 계기가 됐다. 아마추어 천문인 6명과 함께 강원도 횡성 700m 고지 정상에 440평 땅을 사 ‘나다(Nada) 천문대’를 열었다. 하지만 벤처 CEO와 별 보기는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2005년 봄, 황씨는 모든 것을 접고 고향 아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수중엔 빚 갚고 남은 전셋값 9000만원이 전부였다. 낮과 밤이 다른 ‘이중 생활’이 시작됐다. 2년 뒤엔 고향 논 한가운데 자신만의 천문대를 지었다. 강원도 횡성의 나다 천문대는 아산서 다니기에 멀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천문대 이름 ‘호빔’은 자신과 아내·아이들의 이름을 조합해 만들었다. 건축비와 천체망원경 구입에는 모두 2억3000만원이 들었다.

황씨는 아직 자신의 집이 없다. 1억2000만원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돈이 모이면 망원경을 사고, 천문대를 지었기 때문이다.그는 “천문대 짓고 망원경 산다고 하면 남들이 나를 엄청난 부자로 안다”며 “사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도 취미생활에 투자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씨의 별 보기는 이미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5년 전부터 시작한 천체망원경의 핵심 부품 적도의 국산화가 결실을 보고 있다. 로봇 휴보를 만든 KAIST의 오준호 박사와 함께 개발한 적도의가 올해 말까지 3억원가량의 매출을 일으킬 전망이다. 황씨에게 취미가 일이 되고, 피자가게가 부업이 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황씨의 별 보기 욕심은 끝이 없다. 내년 말까지 몽골이나 호주에 ‘원격천문대(remote observatory)’를 세울 예정이다. 천문대는 환경이 뛰어난 해외에 두고 한국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원격 관측’을 하는 천문대다. 그는 “몽골쯤에 천문대를 세우면 건축비·장비 값 2억원, 매달 운영비 60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된다”며 “뜻이 맞는 동호인들과 힘을 모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는 세상은 별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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