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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레, 이젠 발등으로 연기하는 법 배워야 할 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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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5면

‘본때를 보인다’라는 말은 원래 태껸 용어다. 자신이 갖고 있는 태껸 기술 중 가장 비급((祕笈))을 뜻하기도 하고, 태껸판에서 승자가 관중 앞에서 뽐내는 최고급 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25일 오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은 한국 발레계가 관객 앞에 ‘본때를 보인’ 자리였다. “우리 발레가 이 정도입니다”라는 구질구질한 설명 대신, 이들은 힘있는 몸짓으로, 섬세한 연기로 한국 발레의 수준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한국발레협회 창립 30주년 기념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 25일 예술의전당

1980년 설립된 한국발레협회(회장 박인자)의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 중 하나로 기획된 이날 행사는 세계 무대에 한국 발레를 알리고 있는 스타들이 거의 총출동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수진을 비롯해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김세연, 독일 뒤셀도르프 발레단의 김소연, 영국 국립발레단의 유서연, 그리고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의 서희가 차례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외 무용수들과 짝을 이룬 ‘국가대표’ 발레리나들은 한 번은 클래식으로, 다음 번에는 컨템퍼러리로 레퍼토리를 번갈아 가며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ABT에서 얼마 전 솔로이스트로 등극한 서희는 ‘해적’의 파드되를 통해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였고, 그것은 유서연(작은 사진)의 ‘지젤’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초연작 ‘B 소나타’에서 적갈색 망사 옷을 입고 강렬한 몸짓을 드러낸 김세연, 안대 차림으로 나와 눈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몸짓으로 승화시킨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의 김소연도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무대는 강수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으로 1부 무대를 멋지게 마무리 지었던 그는 다시 2부에서 ‘카지미르의 색깔들(큰 사진)’이라는 컨템퍼러리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짧은 탱크톱 상의에 핫팬츠 차림의 강수진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역할을 능숙하고 날렵하게 소화했다. 공연 후 “마흔셋 맞아?”라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렸다.

1부와 2부의 오프닝을 장식한 국내 주니어들의 무대에서는 선배들에게 질 수 없다는 각오가 배어 나왔다. 얼마 전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 시니어 부문 금상을 받은 박세은을 비롯해 이은원·김민정 등 국내 영스타들은 ‘돈키호테’의 한 장면에서 발레가 얼마나 화려한 예술인지를 잘 보여주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KNUA) 발레단 무대는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다.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하나씩 차례로 무대에 오른 젊은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이 보여준 패기와 섬세함에 절로 어깨가 들썩거렸다.

마지막 무대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몫이었다. 데니스 마트비엔코와 아나스타샤 마트비엔코 커플의 ‘돈키호테’는 새삼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에게서 내가 느낀 하나의 팁이라면 “이들은 발등으로도 연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발등으로 표현하는 연기. 한국과 러시아 발레 사이에 아직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디테일한 것이 아닐까.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를 찾아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는 김학자 한국발레협회 고문이 견딜 수 없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후배들을 치하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들 나타난 거니?” 실제로 만나본 해외 스타 발레리나들은 다들 가녀린 몸매의 수줍은 처자들이었다. 무대에서 파드되(2인무)를 추었을 때 객석까지 꽉 채우는 카리스마와 흡인력은 도대체 어디 숨어있는 걸까. 저 몸매에서 어떻게 그런 파워가 나오는 걸까. 그것이 바로 세계 수준의 스타가 감추고 있는 비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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