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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맡은 자, 염치와 정의 외치지만 실제 정치는 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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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8면

그동안 삶의 기술(學問)을 위한 준비로 1)뜻을 세우고(立志) 2)심신을 수습하여(收斂) 3)지식을 추구(窮理)하는 단계를 밟아왔다. 지식 이후에는 당연히 실천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오래된 심연이 있다. 그래서 4)‘진실(誠實)’장이 있게 되었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14>-성실(誠實), “자신을 속이지 마라”

1. 율곡은 말한다. “지식(窮理)을 얻은 다음에는 실천(躬行)해야 하는데, 반드시 진정(實心)이 있은 다음에야 실효(實功)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실은 실천의 근본입니다.” 그는 공자의 오랜 격언부터 인용한다. “정성(忠)과 신뢰(信)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이 바탕을 견지하면 “야만과 환란의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웃의 인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덕성을 순간순간 리마인드시키자. “일어서면 그것이 앞에 있는 듯, 수레에 타면 팔걸이에 그것이 앉아 있는 듯 의식하라. 그런 다음에 걸음을 떼고, 수레를 몰아라.”

이 의도적 자기 점검은 남의 인정을 바라거나, 명성과 이익을 노린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며, 내적으로 충만한 태도이다. 이 영웅적 기획을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나 자신을 위한 학문’이라 부른다.

2. 『대학』의 8조목은 치지(致知) 다음에 성의(誠意)를 두었다. 성의는 지식과 실천을 잇는 최초의 가교다. 원문을 읽어보자. “의지(意)를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악취를 싫어하듯, 멋진 이성에 끌리듯 하는 것인데, 이 (느낌과 행동의 일치)를 진정한 상쾌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獨)를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문장이 어색하고 읽기에 까다로울 것이다. 고금에 논란이 된 구절이고 특히 주자학과 양명학을 가른 문제의 명구라는 것을 우선 일러둔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는 한마디는 퇴계의 평생을 지켜온 경구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지금도 쓰고 있다. ‘스스로를 속인다’고 하는 것은 떳떳하지 않은 일, 아니다 싶은 일을 눈 딱 감고,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주자학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혹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동기가 불순하거나, 필요한 만큼의 액션을 충분히 가동하지 못하는 것도 여기 포함된다. 주자는 말한다. “9할의 공정성에 1할의 사적 동기가 끼어들어도 곧 자신을 속인 셈이 된다.” 이 1할의 사의(私意)는 잠복하고 있다가 다른 상황과 계기를 타고 다시 발호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도 적절한 감시와 처치가 필요하다.

참, 여기서 율곡의 독자적 심성정의(心性情意)론을 소개해야겠다. 성(性)이 잠재적 에너지라면 정(情)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고, 의(意)는 그 이후의 숙고(計較商量)를 가리킨다. 즉 모든 사유는 도구적이고, 변형된 의지다. 이 통찰에 대해 누군가가 “반응이 없어도 사유는 저절로 있다”고 시비하자, 율곡은 “그 또한 이전에 경험된 것들의 흔적과 반추”라고 대답했다. 성의(誠意)는 그런 점에서 지향성으로서의 사유를 다스리는 내면 훈련이다.(지금의 용법과 혼동하면 안 된다. 어째서 이 말이 “성의를 보이라”에서처럼 인정이나 뇌물을, 즉 마음을 재물화해 달라는 요구로 변질되었을까.)

그 피어남(發)은 행동 이전, 자기 속에서 우선 자기 자신에게만 알려진다는 의미에서 ‘홀로(獨)’이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예방과 교화가 더 바람직하듯이 행동 이전에 이들 발단을 미리 다스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안전하고 해피하다. 그래서 “네 홀로를 삼가라(<614E>其獨)”가 표어가 되었다. 이 또한 퇴계가 평생 고투한, 현판에 새긴 네 경구 가운데 하나였다.

3. 홀로를 삼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놀랄지 모르겠는데 지식과 실천 사이의 간격이 줄어든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것은 공적인 지평(義理), 공동체적 관심하에 있고, 실제 행동은 사적 충동(私意)에 지배되지 않는가. 이 괴리가 우리로 하여금 “악취라고 하여 코를 돌리지 않게 하고, 훌륭한 장면에도 마음 놓고 손뼉 치지 못하게”하는 것이다.

이 괴리의 극복 없이 어떤 의미 있는 결과도 기대난망이다. 『중용』은 말한다. “성실(誠)은 사물의 알파요 오메가다. 성실이 없다면 사물은 없다.”
율곡은 다들 효도와 우애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입으로는 부부의 ‘서로 공경(相敬)’을 말하나 제가(齊家)의 실제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간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현자를 보면 기뻐하고 좋아해야 하거늘 마음은 호색(好色)에 빠져 있고, 삿된 것을 보면 미워해야 하는데도 은근히 아부와 친밀을 즐기고 있습니다.

관직을 맡은 자 염치와 정의를 외치지만 일을 처리함에 염치도 없고 정의도 없습니다. 말로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고양시킨다 하지만 실제 정치는 이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간혹 인(仁)을 강제하고 의(義)를 추동하는 자도 있으나, 캐치프레이즈만 요란할 뿐 실제 마음은 인의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어거지와 거짓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날카롭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무디고 게을러지고 마니 이런 유들은 다 실심(實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만사가 다 거짓이니 무엇 하나 실행될 리 없고, 한 마음이 진실해야 만사가 다 진짜가 되니, 무엇을 하든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염계가 왈, ‘정성(誠)이야말로 성인(聖人)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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