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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린 학업의 결과 왜 무시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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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입, 내신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잘못된 균등주의 발상이 발호하는 것은 문제다. 지난 1월 21일자 오피니언 난에 전교조 대변인이 대입과 관련, 극단적 균등주의를 표출했다.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는 것은 노력한 결과다. 따라서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는 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일까.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문제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이유는 노력의 결과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다. 최소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결과가 근본적으로 부정된다면 누가 성실한 노력을 하겠는가.

왜 노력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은 자가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성실하지 않았던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정당성은 아직까지 팽배한 부정부패에 대한 반발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나쁜 짓 해 땅을 샀다고 우기면 조금 덜 아픈지도 모른다.

수가 25% 이하면 내신 부풀리기가 아니라는 해괴한 표준화가 왜 나오는 것일까. 자료 처리를 위해 표준화하는 관습이 있다. 표준화는 자료를 평준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료의 성질을 표준의 닮은 꼴에 맞추어 이해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80점 평균에 10점 표준편차인 A학교와 40점 평균, 20점 표준편차인 B학교를 표준정규분포에 비추어 각 학교의 특성을 알아보는 것이다. A에서 80점 맞은 학생과 B에서 50점 맞은 학생의 학력 수준이 표준화로 같아지지는 않는다. 다만 두 학생은 각 학교에서 50%의 성적 순에 있는 것이다. A에서 96.5점을 맞은 학생과 B에서 77점을 맞은 학생은 각 학교에서 95%의 학생보다 높은 점수를 맞은 것이다. 80점 평균에 5점 표준편차인 학교에서 88.3점을 맞은 학생도 95%의 표준화된 성적을 얻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같은 점수를 주는 것이 평등하다는 해괴한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절대평가 내신의 경우 자기 학생들이 유리하도록 시험을 쉽게 출제해 한 쪽으로 치우친 분포를 만드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똑같은 시험을 보더라도 학력 수준이 높은 학교는 만점이나 그에 준하는 점수를 얻는 학생들이 많아져 성적이 부풀려져 보이고, 학력 수준이 낮은 학교에서는 만점은커녕 평균이 낮아 성적이 오히려 아래로 부풀려져 보인다. 부풀려져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다면 이것이 진정한 평등인가.

학업이나 수능성적에 의한 선발이 인성과 도덕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도 미래를 어둡게 한다. 학생의 일차적인 소임은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성적은 학생이 소임에 책임있고 성실하게 노력했는가를 측정한다. 그런데 학업에 성실한 학생을 잘못된 사람(범생이)이라고 인식시키는 교사가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 역으로 성적이 낮은 학생이 인성과 도덕 면에서 훌륭하다고 주장한다면 학업에 게으른 학생이 이 사회가 원하는 학생이어야 하는가.

생물은 능력에 따라 경쟁하며 생존한다. 다만 사람은 경쟁의 결과를 인정하지만 경쟁에 이긴 자가 독주하지 않는 덕성을 지녔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다른 것이다. 대입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에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경쟁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 것에 대가가 없다면 요행과 끈을 좇는 학생을 키우게 될 것이다. 제비뽑기로 대학을 간 학생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생존을 위한 살벌한 경쟁에서 기댈 것은 오직 기만과 요행이 될 것은 뻔하다. 건전한 경쟁을 부정할 때 로또와 같은 도박에 모든 것을 걸게 마련이고, 흔히 비난하는 혈연.지연.학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나오는가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라면 의과대학을 나와야만 의사가 될 수 있는 것도 문제다. 또한 사범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불평등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