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임기 ‘절반밖에 안 남은’ 또는 ‘절반이나 남은’ MB … 10개 장면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명박 대통령이 25일로 임기 5년의 딱 절반을 맞았다.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가치관과 ‘절반이나 남았다’는 가치관이 교차할 때다. 남은 2년 반을 마무리해야 할 이 대통령으로선 지나간 2년 반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세계 금융위기 극복과 G20 정상회의 유치 등 경제·외교 분야에서의 성공과 국내 정치·남북관계의 우여곡절이 엇갈렸다. ‘2년 반’을 대표하는 10개 장면을 되돌아봤다.

1 ‘강부자’로 추락한 최고 중의 최고 (2008년 2월 27일)

이 대통령 취임 3일째인 이날 남주홍 통일부 장관 후보자와 박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취임식 전날 사퇴한 이춘호 여성부 장관 후보자까지 초대 내각 중 세 사람이 낙마했다. “Best of Best”(최고 중의 최고)를 뽑았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무색해졌고,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강부자’(강남 땅부자)란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에도 인사에선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지난 8일 지명된 총리·장관 후보자들 역시 쏟아지는 의혹 해명에 애를 먹고 있다.

2 박근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2008년 3월 23일)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불편한 관계는 집권 전반기 불안정한 여권 지형의 주범이었다.

대선 직후 박 전 대표의 중국특사 파견으로 조성된 밀월관계는 2008년 3월 18대 총선 공천으로 냉각됐다. 친박근혜계 중진들의 공천 탈락에 박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분노했다.

갈등은 세종시 논란 속에 절정으로 치달았고 ‘화성 남자, 금성 여자’란 소리까지 생겨났다. 두 사람은 지난 21일 회동 이후 새로운 협력 모델을 찾고 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함께 노력키로 했다.

3 촛불로 번진 쇠고기 협상 (2008년 4월 18일)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을 앞두고 정부 내에선 한·미 정상회담 연기론이 불거졌다. ‘4월 9일 총선 때까지 쇠고기의 ‘쇠’자도 꺼내선 안 되고, 4월 19일 워싱턴 정상회담 전에는 협상을 끝내야 한다’는 게 당시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국민 설득을 위해선 회담을 늦춰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로 연기할 수 없다”는 대세론에 묻혔다. 이후 촛불시위로 이 대통령은 시련을 맞았다. 특별기자회견에서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보며,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며 고개를 떨궜고, 한반도 대운하 공약도 스스로 접었다.

4 “Can I drive?” 한·미동맹 (2008년 4월 19일)

촛불시위로 민심을 잃었지만 한·미동맹은 끈끈해졌다. 부시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한 이 대통령이 ‘부시 전용카트’를 손수 운전하겠다며 구사한 “Can I drive?”란 영어는 양국 정상의 친밀감을 끌어올렸다. 우정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G20 정상회의와 핵안보 정상회의 유치 등 국제외교의 고비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6월 토론토 정상회담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 합의도 그중 하나다.

5 눈물로 짐 싼 박영준 (2008년 6월 9일)

집권 초 ‘왕비서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현 지식경제부 차관)이 청와대 입성 3개월여 만에 짐을 쌌다. 류우익 당시 대통령실장에게서 ‘사퇴 통보’를 받은 박 전 비서관은 짐을 싸며 눈물을 펑펑 쏟았고 박 전 비서관의 퇴진은 그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주장이 도화선이었다. 이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는 친이계 세 축인 ‘이상득-이재오-정두언’ 간의 견제와 대립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여파는 최근 민간인 사찰 의혹으로 이어졌다.

6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MB의 기도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나라를 두 동강 냈다. 각계의 시국선언이 잇따랐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 삿대질을 했다. 이즈음 이 대통령은 관저에서 일요예배를 봤다. 이 대통령은 “선진화까지 갈 길이 먼데 왜 우리나라는 항상 이렇게 갈라져야 하나.

경제가 한창 도약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이념 대립이 발목을 잡아 너무나 안타깝다”는 요지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이 대통령은 ‘근원적 처방’이라는 용어와 함께 ‘중도실용과 친서민 정책’을 뽑아들었다. 지금까지도 청와대의 화두다.

7 시나리오에 없던 정운찬 총리 세종시 발언 (2009년 9월 3일)

정운찬 총리는 내정 발표된 날 기자들에게 “세종시를 원안대로 다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전 조율되지 않은 발언에 청와대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했다. 당시 청와대는 내부적으로 ‘세종시 수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설득과 여론 숙성을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정길 대통령실장을 통해 ‘민감한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 전달됐지만, 정 총리가 소신발언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준비 없이 터진 세종시 논란은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 부결로 10개월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8 특별기 속의 만세 삼창 (2009년 9월 2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G20 서울 유치를 확정하고 돌아오는 아시아나항공 특별기. 이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만세 삼창을 했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열사는 회의장에도 못 들어가고 분사했지만, 100여 년 뒤 우리는 G20을 유치했다. 이렇게 기쁜 날 만세라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공일 당시 G20 기획조정위원장이 제안했다. 그해 12월 말엔 400억 달러(약 47조원)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도 일궈냈다. 이 대통령은 직접 모하마드 왕세자에게 여섯 차례 전화를 거는 등 프랑스에 뒤지던 불리한 판세를 뒤집었다.

9 천안함 침몰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밤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으로 악화일로의 남북관계를 더욱 수렁 속에 밀어넣는 사건이었다. 남북관계에서 이 대통령의 운은 따르지 않았다. 2008년 7월 11일 이 대통령은 18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남북 당국의 전면적 대화가 재개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연설 불과 50분 전에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초병의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남북관계는 얼어붙었고, 정상회담을 위한 접촉도 소득 없이 끝났다.

(왼쪽)천안함 침몰. (오른쪽)지방선거 패배

10 지방선거 패배 (2010년 6월 2일)

개표함이 열리자 청와대에서 나온 건 탄식뿐이었다. ‘노무현 사람들의 대약진’ ‘한나라당의 수도권 기초단체장 참패’ 성적표 앞에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던 ‘순장조 참모’들은 모두 청와대를 떠났다.

이 대통령은 이후 청와대와 정부의 수뇌부를 모두 교체하는 극약 처방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대통령은 7·28 재·보선 승리로 한숨을 돌렸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승욱·남궁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