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교문서 공개의 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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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외교통상부가 지난 17일과 20일, 1974년도에 생산된 문서와 그간 공개가 보류돼 왔던 문서 등 외교문서 1063권을 공개했다. 이 중에는 한.일 회담 청구권 관련 문서, 66년 브라운 각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문서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같은 외교문서의 공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공개행정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공개의 기준과 원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브라운 각서는 66년에 한국 정부에 통보된 것이므로 공개 시점은 97년이어야 하는데 왜 이제야 공개했느냐는 것이다. 외교부의 해명에 따르면 외교문서공개심의회의 한 위원이 "베트남전 종전 시점인 75년을 기준시점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찍 공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문서 공개의 기준시점은 문서를 생산하거나, 접수한 시점이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더구나 브라운 각서가 공개심사위원 중 한 인사의 요청으로 이미 90년대에 미국에서 공개됐는데도 국내에서만 공개가 미뤄졌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한.일 회담 관련 문서를 외교부가 공개기준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와의 행정소송을 거치는 과정에서 마지못해 공개했다는 것도 문제다. 외교부는 앞으로 나머지 한.일 회담 관련 문서를 더 공개하겠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외교문서 공개의 정책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의구심이 남는다.

셋째, 어디까지 공개하겠다는 것인지 기준이 불투명하다. 외교통상부는 심의대상 외교문서의 91%를 공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의대상 외교문서의 범위가 부정확한 상태에서는 91%라는 숫자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 알려진 바대로 한.일 회담 관련 문서는 161권에 달하는데, 이번에는 청구권 관련 문서 5권만을 공개했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보면 실제 공개비율은 그리 높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넷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비밀문서와 비공개문서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외교통상부의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을 보면 공개대상인 외교문서는 정보공개법이나 기록관리법의 저촉을 받는 일반문서의 범주에 들어간다. 외교.안보.국방 등과 관련된 문서는 특히 비밀관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비밀외교문서는 외교통상부 내에서 철저히 보안 관리하다가 30년이 지나면 이를 재분류하여 국가기록원으로 이관 관리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다. 미국이나 영국.캐나다 등 다른 나라들도 비밀문서에 한하여 25년 혹은 30년이 경과한 이후 해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가 언급한 외교문서는 비밀로 관리되지 않는 일반문서 중 비공개 처리된 것을 지칭한다. 이렇다 보니 30년간 공개하지 않은 것이 국익을 위해 좋았을 법한 것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이런 정도의 내용을 30년이나 공개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의 대상이 될 것들도 많다. 미국의 제도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 국무부의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편찬사업은 시사하는 것이 많다. 미 국무부는 비밀외교문서를 25년 후에 해지할 수 있도록 300여명의 전직 외교관을 고용해 문서를 검토하고 있다. 이들이 문서 공개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혹 잘못된 외교를 했을 경우에도 이를 교훈 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바탕에는 자국의 외교행위에 대한 자긍심이 깔려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외교문서를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할 때다. 또 차제에 외교문서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통치사료와 같은 주요 문서와 기록물의 체계적인 생산과 공개의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기록관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