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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중진좌담새대통령에바란다]"과학이 경제 원동력…공직理工系할당제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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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세기 첫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당선자는 후보자 시절 '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과학기술 분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부예산 가운데 연구개발 투자 비율을 현재 4.7%에서 7% 수준으로 대폭 확대하는 등 여러가지 공약을 앞세워 과학기술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아쉬움도 크다'는 사실을 어느 계층보다 잘 알고 있는 과학기술인들이기에 '과연 공약대로 실천할까'라는 불신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다. 이에 본사는 지난 20일 박호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이장무 서울대 공대 교수·최영환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가다다 순)과 함께 과학기술인들이 새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편집자

◇과학기술의 인식

▶최영환 이사장='과학기술에 바탕한 혁신'을 국정의 핵심지표로 설정해 국정을 유기적·체계적으로 운영해주면 좋겠다. 과학기술에 바탕한 경제·사회분야 혁신을 기준으로 조직개편·인재등용·자원배분·제도혁신을 해야 한다. 이처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노당선자의 다른 공약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이장무 교수=최근 갤럽 여론조사 결과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최우선 과제는 경제성장으로 32. 7%였다. 노당선자는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는데 선진국·중국과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과학기술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 대선공약 20대 핵심과제 안에 정보화 및 과학기술 5대 강국과 신산업정책에 의한 산업강국 실현 두가지 과제를 제안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본다.

▶박호군 원장=서방 선진국이 지금의 위치에 올라온 배경에는 과학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스탠퍼드대가 3년 전 미국의 생산성을 조사한 결과 1970년대까지 과학기술이 생산성에 미친 기여도는 20%에 불과했지만 90년대 기여도는 49%까지 올라갔다.

▶손욱 원장=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워낙 당연하다 보니 구호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국가혁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동력은 과학기술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정의 많은 부분을 과학기술에 할애해야 한다. 연구비는 늘어났지만 실제 과학기술인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시간의 할애가 없었고 중요성에 대한 표현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장쩌민 전 총리가 해외에만 나가면 공장과 연구시설을 시찰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보좌진들에게 알리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정부기구 개편

▶최=기존 조직의 종적·물리적 통폐합을 최소한으로 하고 '횡적 유기화의 심화'에 중점을 두기 바란다. 예컨대 기존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과학기술자문회의를 '국가기술혁신위원회'로 개편하고 위원장은 대통령, 부위원장은 과학기술전담부처장관, 간사는 대통령 기술혁신수석비서관이 되어 관련 각부처의 정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기술혁신 지향적으로 총괄, 조정하면 좋을 것 같다.

▶손=국과위와 자문위의 싱크탱크 기능이 취약한 것은 사실이다. 신기술과 전통기술이 융합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상황에서 분석력·기획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과학문화 창달을 위해 3%를 쓰겠다고 하는데 7%로 늘려 기획·평가기관을 보강해야 한다.

▶박=무엇보다 21세기 과학기술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과학기술 육성을 위해 국가와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국가가 할 수 있는 부분을 따져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이와 함께 10개 부처에 산재한 정부기능을 연구개발과 관련해 기획과 평가를 총괄할 수 있는 부처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 과학기술부를 부총리급으로 격상할 것을 검토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예산권까지 얹어야 한다.

◇부족한 인력

▶이=대학이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수요에 맞게 움직여야 하나 현재의 인력 수급 시스템은 매우 경직된 상태다. 또 외국은 이공계 출신이라도 법대나 의대·경영대 등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우리도 전문대학원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이공계에 좋은 사람이 많이 몰린다.

▶손=발전적인 산·학·연 연계 시스템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제대로 된 연구중심 대학 10곳을 정해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일본은 30개 대학을 정했고 중국은 1백개를 선정했다. 투자받은 대학은 다른 연구소와 연계를 이루면 기업은 균형적인 발전을 이뤄 좋고 결국 국내 기술혁신 시스템으로 연결될 수 있다. 투자를 받은 교수들이 새로운 학제를 만들어 수요에 맞추는 총론에서는 동의하나 각론에서는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다 보니 차질을 빚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결국 하나의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데 국책연구소의 연구기능과 대학의 교육기능을 접목시키면 가능할 것이다.

▶최=과학문화 확산 정책에 맞춰 사회적인 풍토가 조성되면 과학기술 중심의 인프라가 구성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회 곳곳에서 인센티브 시스템 등이 가동돼 인적자원이 많이 확보될 것이다. 기술적으로 과학기술인의 지위와 급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개 연구소를 선정해 상징적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 인력 수급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커질 것이다.

◇세계화

▶박=이제 외국에 진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에 외국의 유명 연구소를 유치하는 것도 시급하다. 한국에 유치하면 많은 사람이 취업하고 덩달아 기술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의 과학기술은 지금 많은 수의 뛰어난 외국인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손=동북아 연구개발센터의 허브만이 살 길이다. 연구 중심 대학에서 우수한 인재가 많이 나오면 외국기업이 연구개발 센터를 국내에 설립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1차 과제로 정부에서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세계적인 연구소를 우선해 키워야 한다. 1910년에 세워진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지금도 일본을 이끌어가는 대표 연구소로 명성을 잇고 있다.

▶이=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비가 미국 한두개 기업의 연구개발비에도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 그들과 적극적으로 손잡지 않으면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공동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연구개발·기타

▶박=연구개발비는 다다익선이나 정부예산 대비 비율로 따지면 많은 편이다. 미국이 나노기술에 5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는데 우리는 3백40억달러를 투자했다. 절대액수로는 부족하지만 선진국과 같이 경쟁할 수 없으므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후진국일 때는 남의 기술을 모방해도 좋지만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기술을 키워야 한다.

▶이=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연구개발비는 미국의 15분의1, 일본의 5분의 1이었다. 우리의 연구개발비는 건물 건축비도 포함하고 있어 질적으로 더 떨어진다. 총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기초과학 분야 투자를 25%로 확대해야 과학기술의 뿌리가 튼튼해진다.

▶최=창의적 기술혁신을 위해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성에 비춰 중국과 같이 실용적인 접근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에 바탕한 혁신'의 마인드에 투철한 유능한 인재를 과감하게 발탁해 힘을 실어주고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사람을 뽑았으면 한다. 그동안 너무 자주 바뀌다보니 과학정책에 혼선을 가져왔다.

▶손=원칙과 질서가 통하는 선진 시장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지금까지 기업간 경쟁은 기술력의 우위보다는 인맥에 의해 좌지우지돼 왔다. 결국 기술의 중요성이 무시됐다.

▶이=중요 국가운영에 유능한 과학기술자를 참여시키고 활용해 달라. 여성할당제뿐 아니라 과학기술인 할당제도 시행해 줬으면 좋겠다.

▶박=경제발전의 이면에는 열심히 땀흘린 과학기술인이 있었다는 신뢰회복이 중요하다. 정부와 과학기술인간 신뢰가 먼저 회복되면 이공계 기피현상도 극복될 수 있다.

사회=박방주 기자, 정리=심재우 기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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