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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벌써 옆길로 새는 통일세 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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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니다. 통일에 대한 인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비해 비용 부담에 대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표현이 보다 분명하고, ‘통일세’라는 구체적 용어가 사용됐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통일세도 전혀 새로운 얘기라고는 할 수 없다.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통일 과정을 포함해-막대한 비용이 들리란 거야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바고, 그 핵심 재원이 세금이 되리란 건 상식의 범위 안에서 예상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예상 가능하다는 것과,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알면서 알고 싶지 않은 문제가 있고, 져야 할 것 같은데 지고 싶진 않은 부담도 있는 것, 그게 현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이 ‘사회각계의 폭넓은 논의’를 주문한 것도 이런 당위와 현실 간의 괴리를 좁혀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논의 대상을 ‘통일이나 통일비용 부담에 대한 준비’ 같은 폭넓은 의제가 아닌 ‘통일세 등 현실적 방안’이라 밝힘으로써 논의의 폭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 의아했다.

8·15 이틀 뒤 이 대통령은 청와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통일세와 관련, ‘지금 당장 국민에게 과세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사실 경축사에서 통일세 등을 언급했을 때 당장 과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국민이 얼마나 됐을까. 그러니 부연설명에 외려 더 신경이 쓰인다.

청와대 대변인은 ‘통일세 문제는 이 대통령 임기 내 꼭 완결하겠다는 게 아니라 시작을 하겠다는 뜻’이라며 ‘첫 시작을 임기 내에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닷새 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KBS ‘일요진단’에서 통일세에 대해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치겠다’면서도 ‘되도록 효과적, 효율적으로 진행시켜 가급적 빠르게 안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개인적 소견을 전제해 ‘서민들에게 부담이 많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안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통일세 등’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주문한 게 불과 1주일 전 일이다. 이제 겨우 논의가 시작되려 하는 마당에 정부는 벌써 ‘가급적 빨리’ ‘서민부담 크지 않은 방향으로’ 통일세 안을 만들 생각임을 여론화하는 단계로 치닫고 있다. 현 정부가 이미 반환점을 돈 것을 염두에 두면 최소한 내년까지는, 서민부담이 큰 부가세 인상폭을 최소화하면서 독일식으로 소득·법인세를 올리는 안을 만들겠단 얘기 같은데 그렇다면 무엇을 폭넓게 의논하란 건지 알 수가 없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전방위로 영향을 미칠 통일 논의다. 천문학적 비용을 부담해야 할 국민의 공감-최소한 의무감이라도-을 끌어 내야 할 논의다. 설령 결론이 비슷하게 나온다 해도 그 결론을 도출해 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논의다. 정부가 멍석을 깔고 필요한 정보·데이터를 제공한 뒤, 사회 각계에선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이를 수렴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공론화라면 정부는 벌써 옆길로 새고 있다.

박태욱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