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이다. … 나는 언어를 버리고 싶고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절실히 희구하기 때문에 그나마 나는 시인이다. 그것이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또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는 시인이다. … 나는 시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시인 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될 자신이 없고 되기도 싫다. 내가 이런 소리를 공개적으로 해야 하다니 참말로 눈물겹다."(416~418쪽)
11년 만에 나온 소설가 서영은(62)씨의 산문집 '일곱 빛깔의 위안'도 반갑고 고맙다. 자전적 에세이라는데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듯 여러 화자가 등장한다. 프랑스 프로방스의 20살 청년이기도 하고, 유부녀를 연모하는 한 남성이었다가, 꽃다운 나이의 저자였다가, 김동리 선생을 잃은 뒤의 일상을 담담히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관통하는 정서는 뚜렷하다. 그건 존재에 대한 가없는 의문이다. 저자가 평생토록 견지해온 실존주의적 자세이기도 하다.
"인생의 밭은 수확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열매를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한 개체의 죽음.부패.산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덧없음이 아니라 변용을 거쳐 온전한 전체성 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의미한다."(175쪽)
김동리 선생이 저자를 '패랭이꽃'에 비유했던 일(130~135쪽) 등 문학적 스승이자 남편이었던 선생과의 일화도 여럿 실렸다. 현재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김보현 화가의 그림도 인상적이다. 저자와 평소 친분이 도타운 화가의 작품을 실었을 뿐이라는데 삽화를 배치한 것처럼 잘 어울린다.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