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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이 교도소에서 역사학자 변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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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면

미국의 담배회사와 흡사한 이름의 저자 필리프 모리스(47)는 구제받을 길 없는 살인범임에 분명하다.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 저소득층이 몰려사는 파리 변두리 출신인 저자는 범죄의 세계에 먼저 발을 들였던 형의 탈옥을 돕는 것으로 전과를 쌓아 나간다. 차량 절도, 은행 강도, 위조지폐 사용 등을 거쳐 경찰과 대치한 총격전 끝에 살인죄까지 저지른다. 교도소 안에서도 여러 차례의 탈옥 기도에 가담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런 흉악범이 교도소 안에서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하고 학사·석사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면 대단한 뉴스다. 신간은 '사형수 모리'스에서 '역사학자 모리스'로 1백80도 바뀌기까지 극적인 인생유전을 실감나게 재현한 저자의 촘촘한 자전 기록이다.

저자가 23년간 체험한 프랑스 교도소의 실상은 인권 국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잔인하고 열악하기 그지 없다.

교도관들은 대부분 열등감과 편견에 사로잡혀 죄수들을 괴롭히고 파멸로 몰고가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준(準)악귀들로 묘사된다. 난방을 해주지 않아 뼛속까지 시린 추위, 도저히 먹기 힘든-그나마 연명할 정도만 배급되는-형편없는 식사, 인간적인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나체 몸수색 등…. 저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조건들이 총체적으로 모여있는 곳이 프랑스 교도소"라고 고발한다.

범죄의 길에서 키워왔던 막연한 대 사회 증오심리는 인간적인 삶을 박탈하는 교도소 체험을 통해 부조리한 교도행정에 대한 구체적인 증오로 발전한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증오는 희망없는 삶이나마 포기하지 않고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이 된다. 저자는 "광기로 가득찬 교도소 안에서 미치지 않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2000년 3월 출소, 현재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에서 계약직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프랑스 중세사에서 주목할 만한 지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인간은 넘어졌을 때 일어나 걸어야 하고, 편안함을 거부하며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락과 반전을 통해 체득한 인생관이다. 저자의 값비싼 깨달음이 곁들여져 신간은 음험한 교도소에 대한 고발이자 인간 승리의 위대한 드라마로 읽혀진다. 출소한 후 썼다는 점에서 서준식의 『옥중서한』(야간비행),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게),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도솔) 등 수감생활 중 편지글들을 모은 국내 저자들의 책들과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인내와 성찰을 통해 자신을 찾아나가는 같은 과정을 밟는다. 번역도 좋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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