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독일 출신 의사 폴러첸:탈북자들 '대사관 망명' 지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지난 3월 14일 중국 베이징(北京)시 중심가 스페인 대사관. 오전 11시가 되자 알록달록한 관광객 옷차림의 동양인 25명이 대사관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사관 건너편 식당을 곁눈질로 응시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가죽잠바를 입은 금발의 서양인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서양인이 벌떡 일어나 손짓을 했다. 탈북자들은 "와"하는 함성과 함께 중국 경비원을 밀치고 대사관 구내로 진입했다. 아기를 업은 탈북자 여인과 그를 잡아끄는 중국 경비원과의 처절한 몸싸움 장면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CNN의 렌즈를 통해 전세계에 생생하게 전달됐다. 사상 유례없는 '대사관 기획 망명'을 연출한 사람은 독일 출신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44)이었다.

김정일 정권이 '가장 미워하는 외국인'중 한 명인 폴러첸이 처음부터 북한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호치민과 체 게바라를 흠모하는 좌파였던 폴러첸은 1999년 7월 독일의 의료구호단체 '캅 아나무르'의 일원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 평양과 해주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던 폴러첸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된다. 심한 화상을 입은 북한 환자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피부 이식을 해주었던 것이다. 폴러첸은 '공화국 친선메달'을 받고 김정일 생일 행사에 초청되는 등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 11월 평양 교외 도로에 버려진 북한군 병사의 시체를 목격한 다음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안내원은 "신경쓰지 말라"며 거절했다. 안내원과 몸싸움까지 벌였고, 결국 폴러첸은 12월 30일 북한에서 추방됐다.

이 사건은 폴러첸을 '전투적 활동가'로 만들었다. 서울·베이징·워싱턴을 오가며 북한 인권 폭로·탈북 지원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특히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현재 미국 의회가 추진 중인 탈북자 지원 법률도 그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폴러첸 등의 활약으로 올해만도 1천명 가까운 탈북자가 한국으로 향했다.

물론 그의 게릴라식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북한 인권 문제는 가급적 조용히 다뤄야지, 폴러첸처럼 '할리우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폴러첸은 항변한다. "나는 햇볕론자이지만 그 때문에 북한 인권 문제를 덮어두자는 데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북한 인권에 눈을 감는 것은 위선이다. 힘도 조직도 없는 사람에겐 미디어가 유일한 활동수단이다. 탈북자를 도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어릿광대가 되겠다. "

폴러첸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진이 있다. 북한에 머무를 때 자신의 환자였던,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 사진이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어린이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다. 죄없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최원기 기자

brent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