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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무대 액션 한반도 삐딱한 묘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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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제작 단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북한군 역을 맡기기 위해 한국의 주요 배우들을 접촉했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탤런트 차인표가 "한반도를 나쁘게 묘사하기 때문에 출연할 수 없다"며 문대령 역을 포기했고, 비슷한 이유를 들어 탤런트 김영철 또한 북한의 최고통치자 역을 거부했다. 지난달 말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영화가 개봉된 후 이를 본 한국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한국을 후진국으로 묘사했다"는 말이 퍼졌다. 때맞춰 미군 무한궤도차량 여중생 압사 사건의 무죄 평결로 심기가 불편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영화 안보기 운동'까지 벌였다.

개봉 전부터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이 영화, 바로 007의 스무번째 시리즈 '007 어나더 데이(원제 Die Another Day)'다. 12월 호주·아시아 지역 개봉을 앞두고 11일 호주 멜버른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어나더 데이'는 기존의 007 영화에서 한층 진일보한 면모를 보였다. 천하 무적인 007의 이미지 대신 좌절하고 고민하는 인간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그렸다. 그도 고문당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은 기존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적잖은 변화다. 첨단 무기에 의지하기보다 몸으로 직접 싸우고 부딪치는 액션 장면이 많아진 것도 달라진 점이다.

북한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는 정체가 탄로나 포로로 잡힌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한·중 정상회담장을 폭파한 북한 간첩 자오(릭윤)와 본드를 맞교환한다. 그러나 본드는 정보를 누설한 의혹을 받아 정보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본드는 풀려난 북한 간첩 자오를 잡기 위해 쿠바로 향한다. 해변에서 만난 징크스(핼리 베리)와 하룻밤을 보낸 본드는 나중에 징크스가 미국정보국 소속 요원임을 알게 된다.

한편 실종됐던 문대령(윌 윤 리)은 DNA 이식 수술을 통해 외국인 광산 재벌로 변신했다. 그는 열에너지를 이용한 신무기를 개발하면서 한반도와 세계 정복을 꿈꾼다. 본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징크스와 함께 북한으로 다시 잠입한다.

'007 어나더 데이'는 역대 007 시리즈 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1억5천만달러가 투입된 만큼 볼거리도 풍성하다. 초고속 호버크래프트(수륙양용전차)를 타고 본드와 문대령이 벌이는 추격 장면과 얼음 위에서의 카레이싱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물 크기로 아이슬랜드에 지은 얼음 궁전과 파도 타기로 적지에 침투하는 장면은 화려하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007 시리즈를 기념해 영화 곳곳에서 과거 시리즈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만든 점도 한 특징이다. 본드걸이 바다 속에서 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장면은 1편인 '닥터 노'의 장면을 그대로 본땄다. 또 폐쇄된 지하철역의 한 구석에는 1편부터 19편까지 등장했던 각종 첨단 무기들을 진열해 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영화 속 북한 장면은 대부분 영국의 런던 인근과 햄프셔 지방에 세트를 지어놓고 촬영했다. 1백여명의 북한군 엑스트라는 대부분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이다.

'골든 아이(95년)' '네버다이(97년)''언리미티드(99년)'를 통해 제임스 본드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브로스넌은 이번 시리즈에서 한층 더 숙련되고 편안한 연기를 선보였다. 브로스넌은 "이번 편에서야 자신감을 얻었다. 고문당하고 괴로워하고, 때론 평범한 본드의 인간적인 면이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다. 브로스넌은 스물한번째 시리즈에서도 본드로 출연한다.

가수 마돈나의 깜짝 출연도 볼거리다. '에비타''그들만의 리그''넥스트 베스트 싱'에서 호연한 마돈나는 영국의 펜싱학교 조교로 나온다. 마돈나는 영화의 주제곡을 직접 작사·작곡해 부르기도 했다. 31일 개봉.

naz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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