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속의 희·노·애·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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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알몸'이란 단어가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는 알쏭알쏭하다. 벌거벗은 몸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해도 함부로 표현하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인간사회의 묵계다. 의식의 잠금장치라고나 할까.

하지만 미술에서 나신(裸身)은 중요한 도상이자 이미지다. 벌거숭이로 왔다가 벌거숭이로 돌아가는 인생사여도 좋고, 본능에 충실한 욕망과 원시적 생명력을 적나라하게 파고든 상징이어도 괜찮다.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를 채운 9명 작가들의 작품은 모두 알몸을 주제로 했다. '신체풍경'이란 전시 제목은 몸이 만들어낸 삶의 풍경을 말한다.

김명숙씨가 그린 '무제'는 고전적인 자화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수도승같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알몸 위로 생채기같은 수많은 선들이 흘러내린다. 파스텔·크레파스·목판으로 수없이 긋고 지우고 덧칠하는 과정 자체가 도를 구하는 길이다. 이 알몸을 바라보면 고통과 쾌감이 교차한다.

사지 구석구석이 잘리거나 접붙은 모습을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투사한 공성훈씨의 '다지류'는 기술복제시대에 벌레처럼 추락한 인간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암시한다. 알몸으로 아크릴 속에 꽉 끼어 웅크린 남녀들을 찍은 김아타씨의 사진은 물질 상자가 돼버린 인간들의 소통불능이 관람객 몸을 압박한다.

몸의 각 부위를 석고로 떠낸 김일용씨, 알루미늄 망사로 짠 신체 군상을 전시장 천장에 매단 박성태씨, 뒤틀린 알몸 영상을 드럼통 속에 넣어 떠도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윤애영씨, 남성들의 시선으로 관습화돼 은폐되었던 여성들의 몸을 사진으로 말하는 박영숙씨, 철도용 침목을 도끼로 찍어내 실존적인 몸짓을 걸러낸 정현씨, 신체 장기를 알록달록 유쾌하게 해부해 '몸을 음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정복수씨 모두 몸을 즐길 줄 아는 도사들이다.

2003년 2월 23일까지. '신체풍경'전 입장권으로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현대사진전'도 관람할 수 있다. 02-3706-7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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