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현실주의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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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냉전 종식 후 국제정치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들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의 추락이다. 그 중에서도 군사력 약화는 극적(劇的)이라고 할 만하다. 소련 해체 직후 2백80만명이던 병력은 현재 1백20만명으로 미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올해 국방비는 90억달러에 불과하다. 3천9백60억달러인 미국과는 비교도 안된다. 미국이 동유럽과 옛소련 국가들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확대하고, 러시아의 앞마당인 중앙아시아에 군대를 주둔시켜도 이를 제지할 힘이 없다. 러시아는 이제 일개 지역 강국으로 전락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은 소련이 누렸던 초강국 지위를 고집했다. 그러나 결과는 외교적 고립이었다. 옐친의 뒤를 이은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미국·유럽과 관계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9·11 테러 후 미국을 적극 지지하고 협력 관계를 강화해 왔다. 지난 5월 러시아는 미국과 전략핵무기감축조약을 체결하고, 발트해 3국의 나토 가입을 인정했다. 그 대신 나토와 관계를 강화하는 나토-러시아위원회를 설립했다.

푸틴은 안정된 대외관계를 바탕으로 군 개혁을 적극 추진 중이다. 푸틴의 신(新)군사독트린에 따르면 2005년까지 병력을 1백만명 이하로 줄이며,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고, 무기·장비를 현대화하는 한편 유사시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을 편성한다. 작전지역도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국가로 축소한다. 한마디로 러시아군을 종래의 크고 비능률적인 군대에서 '강하고 효율적인 군대'로 바꾸는 것이다.

푸틴의 현실주의 외교로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은 중국이다. 지난해 6월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은 1996년 발족한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 3국의 '상하이 파이브'에 우즈베키스탄을 추가해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출범시켰다. SCO의 목적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 추구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사실상 준(準)나토 회원국이 됨으로써 중국은 나토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국가들마저 미군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SCO는 해체 위기에 빠졌다.

지난 1∼5일 푸틴의 중국·인도 방문은 양국과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한편 송유관 건설과 러시아제 무기 판매 등 다목적이었다. 푸틴은 장쩌민과 만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하고 시베리아 앙가르스크 유전과 중국 다칭(大慶)을 잇는 2천4백㎞ 송유관 건설에 합의했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노골적 비판은 자제하면서 '유엔 중심주의'를 내세워 미국을 견제했다. 이와 함께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핵개발 중지를 요구해 미국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인도에선 9·11 테러 이후 미국과 가까워진 파키스탄을 비난함으로써 인도를 편들었다.

푸틴 외교는 러시아의 위상 저하를 인정하고 미국에 협조하는 '쓴 약'을 삼키면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경제적 이익도 함께 거두는 현실주의 외교다. 중국과 인도 방문에서도 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하고 송유관 건설과 무기 판매 등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 그렇지만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선 정면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유엔을 통한 정치·외교적 해결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푸틴의 현실주의 외교는 러시아의 국력 쇠퇴라는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전문기자 chuw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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