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정치' 말로만 안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기업과 정당은 소비자와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소비자는 시장을 통해 구매력으로 기업의 옥석(玉石)을 구별해 낸다.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한 기업은 퇴출될 수밖에 없다. 유권자도 정치시장을 통해 특정 정당에 국가경영권을 부여하기도, 거둬들이기도 한다. 가혹하다 싶을 만큼 기업과 정당의 생사여탈에 대한 국민의 권리행사가 엄정할 때 국가발전이 가속화된다. 이 때 국민의 생사여탈권이 제대로 행사되려면 책임경영과 책임정치의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 책임을 물을 주체가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경제가 후진성을 면치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책임경영과 책임정치 관행이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임경영의 실종은 급기야 IMF 위기를 초래케 했다. IMF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책임경영 부재로 인한 도덕적 해이의 만연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IMF 위기 이후 기업에 대한 시장규율 강화와 지배구조 개혁 등으로 책임경영은 정착되는 과정에 있다. 회생 가능한 부실기업이 새 주인을 맞아 계속기업(going concern)으로 재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경영에 실패한 경영진에 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구조조정의 부분적 성과는 책임경영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 현실은 책임정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 책임정치의 실종으로 정치는 늘 경제의 '짐'이 되고 있다.

책임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거래계약이 '구속적'이어야 하며 계속기업과 같은 '계속정당'이 존재해야 한다.정치적 거래계약은 대선 후보가 제시한 국정이념과 통치철학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를 의미한다.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정치적 거래계약이 발효되며 그 대상은 전 국민으로 넓어진다. 당선자는 집권당의 대리인이며 집권당은 계속정당으로서 통치결과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정치가 구현될 때 정당의 정체성과 평판이 지켜질 수 있다. 임기가 끝나면 대통령은 떠나지만 정당의 주인인 자신들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계속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거래계약 위반을 따지러 단골가게에 갔을 때 옛 주인은 사라지고 새 주인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연대책임을 져야 할 정당도 모르쇠는 매 한가지다. 이처럼 유권자가 정치적 단골을 맺을 수 있는 계속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정치는 요원하다.

책임정치가 구현되면 집권당은 차기를 위해서라도 오늘 최선을 다하게 된다. 따라서 책임정치는 정치인을 규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미국의 사례를 보자. 1980년 레이건의 선거구호는 명료했다."미국민에게 4년 전보다 살림형편이 더 나아졌는지"를 묻고 경제유인 강화와 감세를 중심으로 공급중시 정책기조를 제시했다. 당시 미국은 2등국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었다. 산업경쟁력은 일본에 뒤졌으며 높은 인플레이션과 이란에 대한 응징 실패 등으로 자신감마저 실종됐다. 미국민은 레이건에게 찬표(贊票)를 던졌다기 보다는 현직 대통령 카터에게 부표(否票)를 던짐으로써 레이건을 당선시켰다. 1993년에 취임한 클린턴은 미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재정적자 감축은 '정부의 관여'를 지향하는 민주당의 전통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흑인 등 저소득층의 바람을 저버리는, 인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1996년 클린턴이 재선된 것은 미국민이 공화당의 도울 후보에게 반대해서가 아니라 클린턴의 공적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역주의·연고주의·후보의 인기 등에 의한 감상적 투표행태를 불식시켜야 한다. 투표자는 정치시장의 '투자자'이며, 대통령은 국가경영을 통해 투자수익을 국민에게 최대로 돌려줘야 할 국가 최고경영자다. 대선 후보를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후보와 소속정당의 국정운영의 성과를 짚어보고 선거공약이 '선진 한국의 길'과 부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차별화를 위한 것인지를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책임정치 관행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옳게 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정보의 보고(寶庫)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