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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감성 할리우드가 반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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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4면

지난 10월 20일 미국에서 개봉된 '링(The Ring)'은 현재까지 1억2천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링'의 원작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공포소설 작가 스즈키 코지의 동명소설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고어 버빈스키가 연출한 '링'은 소설보다, 나카다 히데오가 만든 동명의 일본영화 '링'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주인공을 소설의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 것이나, 원작에서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섬뜩한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스토리와 형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할리우드의 '링'은 충실한 리메이크에, 기묘하게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의 영상을 더해 미국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미 국내에서도 개봉돼 성공을 거둔 일본영화 '링'은 저주받은 비디오 테이프를 본 사람들은 1주일 만에 죽어버린다는 소문을 한 기자가 파헤치는 이야기다. 언뜻 보기에는 동양적인 귀신 이야기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공포영화에는 동양적인 설정이 자주 등장한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서양적인 주제에, 인간과 공존하는 동양적인 귀신들이 등장하며 신비함을 더했다.

'스터 오브 에코' '디 아더스'도 '식스 센스'와 흡사하다. '식스 센스''디 아더스'의 성공에 이어 '링'이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할리우드가 다양한 민족적 감성을 영화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증거다.

서양의 공포영화는 주로 신에 대항하는 악마, 선에 대립되는 악의 존재와 싸우는 이야기였다. 반면 동양의 공포영화는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죽은 사람의 혼령이 호소하거나 괴롭히는 형식이 많았다.

최근 할리우드는 '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시월애'등과 일본의 '카오스''이키루'등 아시아 영화의 리메이크 판권을 부지런히 사들이고 있다. 스페인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에 이어 '링'도 흥행 1위를 차지하면서, 상품성 있는 해외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할리우드가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할리우드는 독일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누벨바그 등의 영화적 형식을 끌어들인 것만으로는 모자라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일본의 사무라이물 같은 독특한 소재까지 탐욕스럽게 흡수해왔다.

최근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붐은 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할리우드가 리메이크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반드시 '미국적'인 내용이 아니라, 소수 민족의 감성이나 정서를 가지고 있더라도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으면 충분히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은 단순한 소재 고갈 때문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 왕성해진 홍콩영화의 유입에서 비롯되었다. 청룽(成龍)에서 출발한 할리우드의 홍콩영화 붐은 마침내 할리우드만이 아니라 세계 액션영화의 형식까지 바꿔놓았다. 이제 와이어(피아노줄) 액션은 세계 공통의 액션 언어다. 또한 '와호장룡'은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화로는 북미에서 첫 1억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얼마 전 미국에서 슬리퍼 히트를 기록한 '마이 빅 팻 그릭 웨딩'은 한 남자가 그리스 여성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 그리스 공동체에 들어가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영화다. 이것 역시 소수 민족의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끌어낸 영화다.

스즈키 코지는 "'링'에는 A=B, B=C 따라서 A=C로 이어지는, 어느 나라에서나 이해되는 공통의 논리가 있다. 그것이 일본에서만 통용되는 토착적 공포와 연결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할리우드의 외국영화 리메이크 붐은 보편적인 논리만 존재한다면, 어떤 이야기라도 얼마든지 할리우드 스타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산물이다.

김봉석(영화평론가)

lotusid@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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