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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참 참신하다, 시어로 그린 그림

시 - 박형준 ‘빗소리’ 외 14편

시인 박형준씨는 “한 사람만이라도 내 시를 읽으며 위로 받을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족하다”고 했다. [조용철 기자]

이런 시에 해설은 필요 없다. 지금까지 소개한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자의 시 중 가장 짧은 듯도 하다. 제목 때문일 텐데, 시의 화자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찾아왔던 여인은 가만가만 창문을 흔들었을 법하다. 술청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여인은 사연이 있어 보일지언정 청승맞지는 않다. 시인의 예민한 시선은 소주잔에 남은 여인의 지문에까지 미친 모양이다. 연상되는 이런 그림들은 모두 마지막 연 빗소리로 모아진다. 참신해라. 빗소리가 빛처럼 반짝인다.

쉽고 선명하면서도 고즈넉한 시의 매력은 ‘언어로 그린 그림’, 이미지 때문인 듯하다. 원래 시인 박형준(44)씨는 이미지를 잘 활용하기로 이름 높다. 그런 개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지난해 박씨가 수상한 소월시문학상의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박씨는 어려서부터 ‘이야기에서 빛을 발하는 이미지’에 호기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고양이에 물려 죽는 비둘기를 보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보다 비둘기의 잿빛 날개가 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보이는데 더 매료됐다는 것이다.

박씨 시론(詩論)의 연장이다. 인터뷰에서 박씨는 “내 시는 의도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주변 풍경이 내게 들려주는 것을 하인처럼 충실하게 받아 적은 기록”이라고 말했다. 풍경 혹은 사물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미지가 건너오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박씨에게 익숙한 풍경은 도심의 재개발구역처럼 뭔가 철거되고 해체되는 공간이다.

박씨는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들 가운데서 희망을 보게 된다”고 했다. 왜 그러냐는 질문은 부질 없다. 역시 박씨의 개성일 뿐이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이런 ‘지침’을 나침반 삼아 박씨의 올해 후보작들을 읽어나가면 막히던 곳들이 더러 풀린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빗소리’ 깊이 읽기다. 박씨는 “‘빗소리’에는 연애 감정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다림에 대해 써 본 시”라고 소개했다. 기다리는 주체는 고향이다. 혹시 내가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해야 맞는 게 아닐까. 박씨는 “나를 중심에 놓는다면 그리움일 테지만 고향에 초점을 맞추면 기다림”이라고 답했다. 퇴락한 고향일지라도 언제고 나를 기다리다 불현듯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박씨의 시편은 예심에서 “언어상징을 사용하는, 우리 시단에 흔치 않은 경우”(평론가 유성호)라는 평을 받았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현대시학 2009년 7월호 발표>


◆박형준=1966년 전북 정읍 출생. 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5회 동서문학상, 24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



어정쩡한 요즘 아버지를 꼬집다

소설 - 손홍규 ‘투명인간’

소설가 손홍규씨는 표준말 일색의 소설과 달리 “거시기하니까” 같은 사투리를 써가며 소통의 어려움을 얘기했다. [중앙포토]

손홍규(35)씨에게 소설은 “더럽고 누추한 세상을 홑이불처럼 한 꺼풀 덮어주는, 겨울철 눈” 같은 것이다. 뭘 감추거나 왜곡하자는 게 아니다. “녹아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 들어 숭고한 무엇을 만들어 주는 것”이란다. 다분히 미학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소설이 “삶 밑바닥을 흐르는 인간이 지닌 생명력, 긍정적인 힘” 같은 것들을 담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그의 글쓰기는 그런 인간적 경이로움을 찾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그는 환상적 요소를 마다 않고 언어를 조탁한다.

가령 그의 2008년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의 표제작은 평생을 소싸움꾼으로 살아 종당에는 그가 소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응삼’이 주인공이다. 응삼은 심지어 소처럼 되새김질도 한다. 허풍의 도를 넘어 비현실적 설정이다. 어딘지 익숙한 듯한 얘기를 새롭게 하는 게 이를테면 손씨의 특기다.

후보작 ‘투명인간’도 그런 공식에 잘 들어맞는 소설이다. 이런저런 장식을 거둬낸 후 메시지로 환원시키고 나면 소설은 빤한 얘기다. 가족 부양의 엄중한 의무에 가위 눌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과의 소통도 파산 지경인 이 시대 아버지가 소재다. 투명인간은 아버지를 지칭한다. 이런 얘기, 손씨는 어떻게 버무려냈을까.

시작은 사소하다. 아버지의 마흔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가족들,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약속한다. 화자인 ‘나’는 농담으로 제안한 건데 어머니는 특별한 선물이 될 거라며, 여동생은 사는 게 따분하던 차에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전등 끄고 촛불 붙인 생크림 케이크 주변에 가족들이 모여 앉은 거실로 이윽고 아버지가 퇴근해 도착한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여긴다. 하지만 가족들의 완강한 연기에 머쓱해지더니 이내 감정을 상하는 지경에 이른다.

사태는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 어느 쪽도 먼저 항복하지 않으려는 신경전이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어떻게 해도 가족들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없는 셈 친다. 이쪽도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자 여동생은 펄펄 뛰고 어머니는 냉담해진다. 한 가정 결딴나는 건 시간문제다.

대답이 뻔할 듯했지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나? “익숙한 얘기지만 가부장의 의무는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권위는 먹히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의 요즘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다.” 손씨의 답은 뻔한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 관계로 확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얘기다.”

손씨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소설이 쓰고 싶었단다. 전에 한 번 시도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건? “어떻게 쓰더라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평론가 김미현씨는 ‘투명인간’이 “손홍규 최고의 세련되고 지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익숙한 아버지 얘기를 그답지 않은 방식으로 ‘새롭게’ 썼다는 얘기일 게다.

신준봉 기자

◆손홍규=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2004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 『귀신의 시대』 『이슬람 정육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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