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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원조 코리아타운 플러싱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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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러나 뉴욕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맨주먹에 말조차 짧았던 이민 1세대에게 삶은 역경의 다른 모습이었다. 유대인이 장악한 맨해튼은 감히 넘볼 수도 없었다. 그나마 한인 이민자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퀸즈 라과디아 공항 옆 플러싱이었다. 30년대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이 개척한 동네였다. 먹고 살만해진 유대인이 떠나자 이탈리아·그리스계 이민자가 터를 잡았다.

한인은 끈질겼다. 온갖 설움과 차별을 견뎌내며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뿌리를 내려갔다. 70년대 중반 뉴욕시가 지독한 불황을 겪자 플러싱 상가는 썰렁했다. 그 자리를 한인이 메웠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출발한 한인 상가는 동쪽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자연스럽게 코리아타운이 형성됐다. 그 한복판엔 공영주차장이 자리잡았다. 주차가 편리하다 보니 코리아타운은 플러싱 상권의 핵이 됐다. 한인 상가가 밀집한 메인 스트리트는 뉴욕시에서 세 번째 번화한 거리로 탈바꿈했다.

플러싱에서 기반을 다진 덕에 한인은 맨해튼에도 코리아타운을 세울 수 있었다. 뉴욕 이민 1세대에게 플러싱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작 생활이 안정되자 플러싱은 구심력을 잃었다. 자녀 교육 때문이었다. 하나둘 좋은 학군을 좇아 이웃 낫소카운티나 아예 뉴저지주 버겐카운티로 옮겨갔다. 유대인 동네에 살며 장사만 플러싱에서 하려다 보니 굳이 플러싱 상가를 안고 있을 까닭도 없었다.

그 틈을 중국인이 파고들었다. 코리아타운에 매물이 나올 때마다 족족 사들였다. 급기야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자존심인 ‘코리아 빌리지’ 건물조차 중국 자본에 넘어가게 생겼다. 한국어 간판이 즐비하던 거리는 낯선 중국어 광고판으로 뒤덮였다. 지난달 말 그나마 버티고 있던 한인 상가에 마지막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공영주차장 자리에 ‘플러싱 커먼스’라는 초대형 주상복합단지를 건설하려는 대만계 자본의 계획이 시의회를 통과한 것이다.

건물주야 공사기간 2~3년만 참으면 부동산값이 뛸 테니 영업 손실쯤 겁날 것이 없다. 그러나 세든 한인 입장에선 버틸 재간이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플러싱을 뜨는 상가가 속출하고 있다. 정작 플러싱 커먼스가 완공될 무렵 이곳은 차이나타운이 돼 있을지 모른다. 한인 이민 1세대가 피와 땀으로 일군 상권이 통째로 중국인 손에 넘어갈 판이다. 이를 뻔히 보면서도 한인 사회는 속수무책이다. 어째 이런 광경을 앞으로도 심심찮게 볼 것 같아 영 입맛이 쓰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