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탄력 받는 드라마 ‘자이언트’ 강모 역 이범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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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굵은 대하드라마의 주연으로 거듭 난 이범수. 강모 역에 강한 애착을 보이면서도 “강모가 성공하기 위해 택하는 방식들에 동의할 지는 시청자의 몫”이라고 했다. [김경빈 기자]

SBS 드라마 ‘자이언트’의 주연 이범수(41)를 서울 논현동 소속사 사무실로 만나러 가는 길. 동호대교를 지나자 한강변에 고층 아파트가 빼곡했다. 더 가면 개포동이다. 극중 강모(이범수)가 형 성모(박상민), 여동생 미주(황정음)와 얼싸 안으며 “이게 다 우리 땅”이라고 기뻐했던 곳. 실제 개포동 일대는 1970~80년대 강남 개발 붐의 주요 진원지였다. 드라마는 그렇게 도시의 역사를 곱씹게 한다.

“촬영 시작하고 제대로 쉬는 날은 처음”이라는 이범수의 표정이 밝았다. 마침 ‘자이언트’가 처음으로 월·화극 1위에 올라선 날이었다. 전날(10일) 시청률이 22.9%(전국 기준, AGB닐슨미디어리서치)로, 1위를 지켜왔던 MBC ‘동이’(21.3%)를 제쳤다. 그는 “강모도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기득권 집단에 맞서는데, 드라마도 후발주자로서 판세를 뒤집은 게 뿌듯하다”고 말문을 뗐다.

“대본이 탄탄해서 걱정은 없었어요. 연기자로서 어려웠던 대목은, 아역에서 넘겨받을 때 워낙 천진난만했던 이미지라 성인 강모의 그늘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공사 장면 촬영 정도? NG 나면 삽질 하던 거 다시 메우고 또 하고…. 이젠 사장 됐으니 삽질 끝났죠.”

강모는 개발세대의 억척인생을 표상한다. 부모를 잃고 형·여동생과 뿔뿔이 흩어져 잡초처럼 살다가 건설업을 통해 일어선다. 이들 3남매를 고리로 조필연(정보석)과 황태섭(이덕화) 등 권력과 기업이 유착·대립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강모가 삼청교육대까지 전전하는 대목에선 신산했던 80년대 현대사가 비친다. 이범수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한 작품”이라고 했다.

“‘외과의사 봉달희’를 할 땐 의사들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니, 요즘은 아파트 공사현장을 지나칠 때 예사롭지가 않아요. 강모가 특허 낸 기술들이 당시 실제로 도입된 공법들이잖아요. 벽을 툭 쳐보며, 시멘트와 모래 비율이 어떻게 될까 생각도 해보고….”

태어난 곳은 충북 청주지만, 서울 강남은 제2의 고향이다. 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 때부터 터 잡고 20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 동안 별 생각이 없었다. 한강 다리가 강남 개발 목적으로 놓였고, 이 다리들이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됐고, 그 일대가 개발될 때 떼돈 번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시놉시스를 보니, 강남 땅을 두고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쟁탈전이 확 다가오더라고요. 바로 출연을 결심했지요.”

굴곡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오해가 ‘MB 찬양드라마’라는 것. 건설업계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로만 이해된 까닭이다. 김명민이 이 때문에 캐스팅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오해를 부풀렸다. 그러나 그는 “내 것이 되려고 그랬나 보다”며 만족해했다.

“그 동안 말만 주인공이지 갈등을 엿보는 입장이었죠. 이제부턴 사업가로 변신한 강모의 두뇌플레이가 시작됩니다. 원수의 딸인 정연(박진희)과 애증의 관계도 본격화될 거고요. 조필연·황태섭과 똑같진 않아도, 성공을 위해서 어느 정도 줄타기는 하겠죠. 이 또한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 세대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 길, 남산 순환도로 아래 주택촌이 다닥다닥 이어졌다. 좌초 위기에 놓인 31조원짜리 프로젝트 ‘용산 재개발’ 현장도 멀지 않다. 그 어딘가에 우리 시대의 강모도 욕망의 도시를 질주하고 있겠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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