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의 '아름다운'패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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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직장에서 과장자리 같은 것을 놓고 비슷한 능력의 동기생들과 경쟁을 벌이다 지거나 이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긴 쪽의 기쁨이 큰 건 당연하겠지만, 탈락한 경쟁자가 자기 패배를 흔쾌하게 인정하고, 상대방을 찾아가 축하까지 해주기란 경험적으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5일 새벽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정몽준(鄭夢準)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TV 앞에 나타나 "노무현(盧武鉉)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 앞으로 盧후보가 당선되도록 돕겠다"는 짤막한 발표를 했다.

盧후보에 대해 패배 인정, 축하, 승복(承服)의 메시지가 그의 발언에 모두 담긴 셈이다. 그는 집에 돌아가 맥주를 한잔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鄭대표는 몇시간 후인 이날 오전 10시20분 국회에서 盧후보를 만나면서 10여m 떨어진 곳에서부터 큰 소리로 "축하합니다"를 외쳤다.

'후보 단일화'가 옳으냐 또는 바람직하냐에 대해선 사람마다 입장차가 있다. 또 정치인의 모든 행동엔 대체로 이중성과 이해타산의 계산법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단일화 약속이 지켜진 것에 대해 그 공을 鄭대표의 승복 때문으로 돌리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97년 이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약속 파기, 경선불복의 정치를 보아왔다. 합의는 깨지게 마련이고 어제 한 말이 오늘 뒤집히는 것은 정치의 상식쯤으로 치부됐다. 더구나 이번 단일화는 세력이 확연히 기울었던 DJP 단일화나 '이회창-조순 단일화'와는 다르다.

따라서 정치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아무리 정교한 합의이행 장치를 마련해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곤 했었다. 실제로 鄭대표 측은 한때 상식적이지 않은 문제 제기를 통한 약속파기의 유혹을 느끼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패자의 승복 선언은 그게 우리 정치에서 벌어진 상황이기에 신선하다. 이날 鄭대표는 "국민의 지지가 떨어지면 후보직뿐 아니라 현직도 관둘 수 있어야 한다"는 출마선언 이래 그의 지론을 실천에 옮겼다. 鄭대표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깝지 않은 이유들이다.

chuny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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