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승리까지]'정면 돌파'로 단일화 승부수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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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후의 승자인 민주당 노무현(盧武鉉·얼굴)후보. 그는 승부사 스타일이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후보를 꺾고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4년의 정치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그동안 그는 크게 세번의 모험을 시도했다.

첫번째는 92년 3당합당 거부, 두번째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 북-강서을 출마를 결정한 2000년 4·13총선이다. 그는 이때마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담보로 잡혔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3당합당을 거부하거나 서울의 노른자위 지역구를 차버린 결과는 모두 그에게 좌절을 안겨줬다.

그러나 고비마다 벌인 그의 '무모한 도전'은 그를 대선주자로 대중에게 각인되게 했다.

세번째 승부수였던 이번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후보와의 '단일화 대첩'에서도 그는 유일한 자산인 국민경선 후보직을 내걸었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식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당내 반(反)노무현 세력의 줄 탈당이 진행되던 중 盧후보는 "국민경선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자"고 선수(先手)를 쳤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선수를 쳐서 주도권을 잡고 나간다. 협상과정에서 자질구레한 것은 모두 양보한다"는 그의 정치스타일이 이후의 협상 과정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지난 15일 후보회담에서 단일화에 최종 합의할 때까지 그는 연속으로 양보를 통한 공세로 鄭후보를 압박했다.

국민경선 대신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했고, 단일화 합의 직후의 각종 여론조사 때는 단순지지도 2위로 도약했다. 마지막엔 여론조사 방식까지도 鄭후보 측 요구를 대거 수용했다.

패배할 경우의 책임은 盧후보 개인의 문제를 떠난 것이었다. 일단 그가 소속한 민주당은 집권당으로서 후보를 내지 못하는 전무후무한 위기를 맞이할 뻔했다.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의 명맥이 盧후보대에 이르러 단절되는 일이 50% 이상의 확률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민경선 후보직을 내건, 곡예와도 같은 대도박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盧후보의 승인은 승부사적인 결단의 모습과 사상 초유의 여론조사 승부라는 비정상적 상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분석이다. 이번 조사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 지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응답자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여론조사의 첫 질문에서 李후보 지지자들을 가려내고 나머지 응답자들에게만 단일후보를 선택할 질문을 던진 것이다. 鄭후보 측이 제기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역(逆)선택 방지책 때문이다.

자연히 응답자 가운데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 지역적으론 호남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높아졌다.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鄭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사람은 정몽준"이란 점을 꾸준히 부각하는 동안 그는 '원칙과 방향'으로 쟁점을 몰아갔다.

그러나 22일 TV토론 등에서 鄭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후보는 정몽준"이라고 집요하게 설파하면서 최대 승부처인 호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TV토론 이후 鄭후보 지지도가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 鄭후보로 결집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급기야 여론조사가 진행되던 운명의 24일, 盧후보는 부산·경남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광주·전주를 방문해 "鄭후보는 3당 합당에 합류했지만 나는 지역 분열에 항거하기 위해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한편으론 자신이 민주당 적자(嫡子)임을 내세웠다. "鄭후보로 단일화되면 민주당이 법통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민주세력의 역사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측근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치는'노무현 특유의 전술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광주·전주 등을 훑으면서 가는 곳마다 "단일 후보가 되면 나도 李후보를 이길 수 있다"고 鄭후보 측 홍보 논리를 차단했다. 단일 후보로의 盧후보도 이회창 후보에게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난 주말 여론조사 결과는 盧후보의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줬고, 결국 민주당 전통적 지지층은 盧후보 쪽으로 결집했다.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고비마다 결단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단일화를 바라는 호남의 민심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주효했다는 평가다.

때마침 터져준 이익치(李益治)전 현대증권 회장의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한 증언이 鄭후보를 괴롭히는 동안 盧후보는 '의혹 없는 후보, 허물없는 후보'임을 강조했는데 이 또한 맞아떨어진 듯하다.

일단 盧후보는 초유의 여론조사 승부에서 鄭후보를 꺾고 한때 지지율 50% 이상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을 재도약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盧후보가 싫든 좋든 한나라당은 이번 대선을 보혁(保革)대결로 몰아간다는 전략이다. 鄭후보가 아닌 盧후보로 단일 후보가 결정되면서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이 구상하던 '반(反)이회창 연합구도'는 헝클어지게 됐다. 오히려 지역적으론 '호남 대 반호남'의 지역구도가 형성될 가능성도 커졌다.

盧후보로선 당내 반대세력들의 이탈을 막고, 고향인 영남에서 일정부분의 득표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패자인 정몽준 후보에게서 얼마만큼 협조를 얻어낼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명목적인 공동선대위 구성을 넘어 과연 대선기간 중 鄭후보의 실질적 협조를 구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盧후보가 강조해오던 원칙이 단일화 과정에서 상당부분 훼손됐다는 점도 부담이다.

盧후보는 "서로 정체성, 살아온 길이 다른 鄭후보와는 단일화하지 않겠다"고 천명해오다 막판에 소신을 꺾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실패할 가능성이 컸던 싸움마저 곧잘 정치생명까지 내걸고 벌이는 방식이 이번 단일화 국면에서도 재현된 점은 그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씻는 데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유일한 서민 후보'임을 자임하고 있는 盧후보는 경남 진영에서 과수원을 하던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부산상고) 졸업이다.

그는 88년 13대 총선, 98년 종로 재·보선 두번의 선거에서만 이기고, 92년 14대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등 네번의 선거에 낙선했다.

하지만 지난 3, 4월의 민주당 국민경선에선 노풍(盧風·노무현 지지바람)을 일으키면서 이인제(李仁濟)대세론을 꺾고 대선 후보로 당선됐다. 대선 후보를 결정짓는 큰 승부에서만 이번이 두번째 승리다.

'노무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계기가 됐던 88년 11월 5공 청문회에선 鄭후보의 선친인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치밀한 추궁으로 궁지에 몰기도 했다.

현대가(家)와는 2대째 기이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는 셈이다.

강민석 기자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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