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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지배자’ 트레이더 몰락, 헤지·사모 펀드 대중화 앞당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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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호 24면

‘우주의 지배자(Master of the Universe)’.
금융회사 자기자본을 운용하는 트레이더(Proprietary Trader)의 별명이다. ‘우주’는 돈이 지배하는 세계 곧 미국 월가를 의미한다. 미 소설가 톰 울프가 1987년 발표한 '허영의 불꽃'에서 트레이더들을 처음 이렇게 불렀다. 80년대 월가 변화를 반영한 별명이다. 당시 트레이더들이 월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트레이더들은 고객의 돈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와는 좀 다르다. 트레이더들은 최근까지 30년 동안 월가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사실상 쥐락펴락했다. 최고급 정보, 최신 투자모델, 첨단 매매 시스템,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무장한 그들은 무수한 금융시장 참여자들을 유린했다. 펀드매니저나 개인투자자들은 그들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난공불락이었다. 음모론의 주인공들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美 월가의 금융권력 교체-재테크 지도가 바뀐다

트레이더들은 수십억 달러를 베팅했다. 한순간의 가격 변동을 틈타 일반 노동자의 평생 소득과 맞먹는 수익을 거둬들이기도 했다. 그 대가로 보너스 수천만 달러를 챙기곤 했다. 그들 가운데서 미국 재무장관(로버트 루빈)이 나왔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수장(로이드 블랭크페인)이 배출되기도 했다.그들의 세상이 저물고 있다. 이른바 볼커룰 때문이다. 은행 면허를 가진 금융그룹의 자기자본 트레이딩이 제한됐다.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설립이나 투자에도 족쇄가 채워졌다. 미국 메이저 금융그룹들이 트레이딩 부문 해체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영웅(트레이더)들이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월가의 상징‘꿈의 구장’ 사라지나
골드먼삭스의 트레이딩 부문은 트레이더들 사이에선 ‘꿈의 구장’이었다.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이 일했던 곳이다. 로이드 블랭크페인이 투자은행 부문 사람들을 물리치고 골드먼삭스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데 발판이기도 했다. 월가에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꼭 일해보고 싶어하는 곳이었다.골드먼삭스는 트레이딩 부문의 성공에 힘입어 세계 최대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했다. 올 5월까지 이 부문에 자기자본 100억 달러(약 12조원)를 배정해 운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골드먼삭스 CEO 블랭크페인(56)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트레이딩 부문을 다른 부문과 완전히 분리시켰다. 구조변화의 전 단계 작업이라고 뉴욕 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

블랭크페인은 두 가지 옵션을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트레이딩 부문을 자산운용 부서와 통폐합하는 방안이다. 유능한 트레이더들을 펀드매니저로 변신시켜 고객의 돈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안은 트레이딩 부문 폐지다. 블랭크페인이 이 카드를 뽑아들면 트레이더들은 대부분 골드먼삭스를 떠나야 한다.골드먼삭스 대변인인 루카스 프래그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두 가지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며 “어쨌든 우리는 새로운 법(금융개혁법)을 준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블랭크페인은 자신이 성장한 디딤돌을 제거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경영 실패의 주범으로 몰려
세계 2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서는 좀 더 잔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트레이더 숙청작업이 진행 중이다. 올 1월 CEO 자리에 오른 제임스 고먼(51)이 그 작업을 이끌고 있다. 그는 “트레이딩 부문이 위험한 게임을 벌이는 바람에 회사가 (금융위기 와중에) 붕괴 위기에 몰렸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볼커룰을 지키는 차원이 아닌 셈이다. 전임인 존 맥(66)의 세력을 소탕하려는 속셈마저 엿보인다.

로버트 루빈

현재 이사회 회장인 맥은 CEO 시절 모건스탠리를 헤지펀드와 비슷하게 바꿔놓았다. 그는 평소 “모건스탠리가 증권을 인수하고 M&A를 알선하는 일(투자은행)에 집중하는 바람에 달러 박스인 트레이딩 부문을 소홀히했다”며 “그 결과가 바로 골드먼삭스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모건스탠리 자기자본을 과감하게 베팅했다. 그 대상이 바로 모기지 관련 변종 증권들이었다.회사 자기자본보다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자산운용 부문 출신인 고먼은 올 1월 CEO에 취임하면서 첫 일성으로 “우리가 금융위기 와중에 흔들렸는지를 살펴봐야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무엇을 잘했고 잘못했는지를 가려내겠다는 말이다. 현재 고먼은 트레이더들을 자산운용 부문으로 전보시키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WSJ는 최근 보도했다.

상업은행 성격이 강한 씨티그룹,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은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나 모건스탠리보다 한 걸음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 금융그룹은 볼커룰이 입법화되기 훨씬 이전인 올 1월부터 트레이더들을 내보내거나 펀드매니저로 변신시켜 재활용하기 시작했다. 트레이들은 회사 내부 펀드매니저로의 변신을 치욕으로 여긴다. 보너스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 실적 20~30% 나빠질 듯
미국 은행 애널리스트 리처드 보베는 볼커룰이 화두였던 지난해 11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자본 트레이딩 금지로 은행들의 투기적 행위가 없어질 수 있지만 미 금융그룹들은 최대 수익원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실제로 트레이딩은 70년대 말 이후 가장 큰 달러 박스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전통적인 수익원의 고갈이었다. 증권 인수, M&A 알선, 경영 자문, 보증 등 여신서비스의 돈벌이가 시원찮아졌다. 금융회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수수료를 깎아주며 고객을 끌어들인 탓이다.
증권 인수나 M&A 알선 등은 금융회사가 거래 당사자로 나서는 게임이 아니다.

지식·정보·네트워킹 능력을 활용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일이다. 금융 전문가들이 이를 ‘무위험 금융비즈니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트레이딩은 금융회사가 거래 당사자로 나서 증권이나 상품을 사고 판다. 여차하면 자기자본을 까먹을 수 있다. 대신 더 큰 수익을 챙길 수 있다. 고위험·고수익 원리가 작동하는 영역이다.트레이딩의 부상으로 월가의 힘은 트레이더들에게 집중됐다. 이전까지 월가의 주류는 투자은행가와 펀드매니저들이었다. 훨씬 이전에는 증권브로커들이 월가를 이끌었다.투자은행들은 트레이딩을 위해 90년대 경쟁적으로 기업공개(IPO)를 단행했다. 주식을 팔아 조달한 돈(자기자본)으로 판돈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시중은행들은 90년대 말 투자은행 업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트레이딩에 뛰어들었다. 금융회사들이 트레이딩에 거의 의지하다시피 하게 됐다. 보베는 “트레이딩이 금지되면 금융그룹들의 실적이 적어도 20~30% 이상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재테크 환경 요동
트레이더들은 90년대 후반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증권 인수 등을 담당한 은행가들과 사내 경쟁에서 승리했다.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 등에서 트레이더 출신 CEO가 탄생했다. 승리는 금세 오만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고수익을 좇아 날이 갈수록 더 위험한 플레이를 벌였다. 고객의 돈을 운용하는 자산운용 부문(펀드매니저)과 충돌하기도 했다. 자산운용 부문이 고객의 돈으로 사놓은 주식이나 채권 등을 트레이더들이 공매도 가격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트레이더들에 대한 공격이 비등해졌다.

이제 트레이더들은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현재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더라도 앞으론 예전같이 많은 보너스를 기대할 수는 없다. 트레이딩 규제로 실적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부 트레이더들은 볼커룰 규제를 받지 않는 유럽계 금융그룹으로 이적하고 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유럽 국가들도 트레이딩 규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WSJ는 트레이더들이 독립해 헤지·사모 펀드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최근 전했다. 헤지·사모 펀드 업계에 태풍이 불 듯하다. 미 금융시장 분석회사인 샌퍼드번스타인의 수석 분석가인 브래드 힌츠는 WSJ와의 인터뷰에서“금융그룹에서 해고된 트레이더들이 헤지·사모 펀드를 설립하면서 수수료를 경쟁적으로 떨어뜨리며 투자자들을 유인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내다봤다. 적어도 미국에서 헤지·사모 펀드 대중화가 앞당겨질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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