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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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뉴욕에 살던 두 청년이 20년 후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 청년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서부로 갔고, 다른 한 청년은 뉴욕에 남았다. 20년 후. 서부로 갔던 청년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식사했던 식당 자리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마침 야간 순찰 중이던 경찰관이 잠시 그와 얘기를 나누다 사라졌다. 잠시 후 친구가 나타났다. 둘은 신나게 얘기하며 걷다가 불빛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친구가 아니었다. 지명수배된 서부 청년을 쫓는 형사였다. 정확히 약속 시간에 나타났던 진짜 친구(경찰관)는 차마 그를 체포할 수 없어 그냥 지나친 뒤 동료 형사에게 알렸던 것이다.

오 헨리의 단편 '20년 후'의 줄거리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우리 화단(畵壇)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중견화가인 이종목(이화여대)·조덕현(이화여대)·최진욱(추계예대)교수가 1997년 '20년 후'란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대 미대 76학번인 이들은 20년 뒤 함께 전시회를 갖자던 학창시절 약속을 지켜 화제가 됐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미덕이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파이 껍질과 약속은 깨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던가. 사람(人)의 말(言)로 하는 게 약속이지만 요즘엔 믿을(信) 수가 없다. 금석뇌약(金石牢約)이니 하는 말은 옛말일 뿐이고 요새는 시쳇말로 '남아일언풍선껌'이다.

특히 식언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국민에게 한 것이든, 자기들끼리 한 것이든 정치인들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진 게 없다.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및 유신체제 도입이라면, 최근 눈에 띄는 것은 DJP 공조파기다. 이렇게 보면 우리 현대정치사는 '약속파기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제 여기에 또 하나의 싱싱한 케이스가 추가될지도 모른다. 盧-鄭 후보단일화 약속이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삐걱거린다는 소식이다. 하기야 표만 된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게 정치인이라는데 나에게 유리하다면 무슨 약속인들 못할까.

그건 그렇고 여론조사로 후보를 뽑자는 약속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 아닐까. 만약 둘의 지지율이 똑같이 나오면 어쩌나.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두달 전 독일 총선에서 여야 양대 정당의 지지율은 38.5%로 기적처럼 똑같았다. 모집단이 6천만명을 넘는 총선에서 그랬으니 기껏 1천∼2천명으로 하는 여론조사에선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땐 가위바위보로 뽑나?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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