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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희생자 첫 명예회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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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가운데 1천7백15명의 명예가 정부에 의해 최초로 회복됐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金碩洙국무총리)는 20일 전체회의를 열고 신청자 가운데 1천7백15명을 '4·3사건 희생자'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폭도' '빨갱이'등으로 불렸던 희생자 일부의 명예가 회복돼 사건 발생 후 54년 만에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번에 희생자로 확정된 사람들은 명예 회복과 함께 제주시 봉개동에 조성 중인 '제주 4·3 평화공원'에 묘비 안장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과 달리 이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위원회는 이날 오전 5차 전체회의를 열고 "이미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86명을 제외하고 심사소위에서 통과된 전원을 희생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소위원회는 제주도 실무위원회(위원장 禹瑾敏제주도지사)가 1차로 심사를 요청한 4천1백19명 가운데 지난 9월 1천8백1명을 결정, 전체회의에 상정했었다.

명예가 회복된 희생자의 유형은 사망 1천4백73명, 행방불명 2백42명 등이다. 남자가 1천3백명, 여자가 4백15명이며, 이 가운데 10세 이하 어린이도 1백4명이나 포함됐다.

정부는 2000년 1월 4·3특별법을 제정, 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희생자 본인과 유족의 신고→시·군의 사실조사→제주도의 확인조사를 벌여왔다.

◇제주 4·3사건=1947년 제주도 관덕정(군사 훈련소)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장에서 친일파 숙청을 요구하는 민중시위대에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진 것을 계기로 벌어진 소요사태.

3·1절 사건을 계기로 간헐적으로 벌어지던 도민·입산 게릴라들과 경찰의 충돌은 급기야 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하는 대규모 민중 무장봉기로 폭발,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이 54년 9월까지 계속됐다.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했으나 2000년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금기시돼 왔다.

제주=양성철 기자

ygodo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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