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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바닥에서 詩를 건져올린 지하철 시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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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하루 1백만명의 서울 시민이 이용하는 지하철. 이를 움직이는 서울시 지하철공사에는 항상 꿈꾸는 시인이 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숱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도시인들의 메마른 영혼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두손 모아 빈다.

최근 다섯번째 시집 『안개 바람 안개 비』를 펴낸 김경수(金京秀·46)씨. 서울시 지하철공사 지축차량사업소에서 일하는 그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의 문화정책위원이며,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긴장된 눈동자로/잠을 깨며 달려와/잠을 다시/청할 준비하는 곳/언제나 반갑게 맞는/타인들의 영원한 고향"(金씨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8')

金씨는 '귀족 시인'이 아니다. 빌딩숲에 둘러싸인 차가운 도시에서 밑바닥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1976년 그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전북 장수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공사판을 전전하고 미싱 보조·구두닦이·노점상을 하다 82년 지하철공사에 입사했다.

시를 쓰기 시작한 건 80년.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탈출구를 찾던 그는 어느날 시인 바이런을 만나 서정성에 빠져 들었다. 시는 그에게 희망봉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쓴 시는 동인지와 문학잡지 등에 발표한 것만도 1천여편에 달한다.

"동료들은 저더러 저항시인이라고 부르죠. 시가 직선적인 데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전자부품의 저항과 관련된 것이라 그런 것 같아요."

시작(詩作)활동 초기 金씨는 천덕꾸러기였다. 그는 80년 시인 문창길·류명환씨 등이 활동하고 있던 '두레 시 동인'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고지에 시를 써서 중견 시인에게 보여줬더니 '이게 무슨 시냐'며 원고를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행복했다. 그저 시가 좋았다. 그는 2년간 시의 기초를 닦은 뒤에야 비로소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지하철공사에 들어간 뒤 그는 주경야독으로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99년에 졸업했다. 그는 공사에서 24시간 2교대로 일을 하면서도 시 세계와 단절하지 않았다. 지하철을 수리하고 검사하면서 온종일 일과 씨름한 다음날에도 시 쓰는 데 몰두하다 코피를 쏟곤 했다. 피로가 누적돼 정신을 잃기도 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시에 반해 결혼한 황옥님(43)씨조차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를 막을 수는 없었다.

金씨는 아름다운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대학 등에서 문학 세미나나 심포지엄이 열리면 24시간 근무를 마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갔다. 이렇게 10년 넘게 시에 매달린 金씨는 92년 '문학세계'의 신인상을 받으며 정식 시인이 됐다. 그는 본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고 성실하게 일해 사장상을 세번이나 받았다. 지하철과 함께 한 金시인의 20년. 그의 시에는 지하철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지하철역에선 다양한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시에 담을 수 있어 참 기쁩니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꿈을 꾼다. 그리고 시를 쓴다.

손해용 기자 hysoh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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