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로 대선후보 뽑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후보 단일화 합의는 일대 사건이다.

그러나 기왕에 이뤄진 단일화 합의라고 해서 그에 대한 평가까지 과거지사로 흘려버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정치적 동질성이 없는 후보의 단일화는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盧·鄭 두 사람은 단일화 합의 직후 "낡은 정치의 틀을 깰 정치혁명"이라 했지만 명분없는 행위는 오히려 낡은 정치의 답습이다. 과거 몇차례의 단일화 논의에선 노선의 유사점이 있거나 추구하려는 정책 목표가 있었지만 盧·鄭 단일화에선 '반(反)이회창 후보' 연대 이외의 것은 찾아 보기 힘들다. 특정인 당선 저지만을 위한 지지율 2, 3위 인사의 연대는 정치를 희화화(戱畵化)하기 쉽고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盧후보는 '후보 통합'이 아닌 '유권자 통합'이라는 말로 후보 단일화의 명분을 찾고 있다. 그는 대선의 예선 성격을 갖는다고 단일화를 변호하지만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정치를 부인하는 발상이다. 우리는 이미 DJP 단일화의 정치적 퇴행과 실패를 목격한 바 있다. 다른 노선의 후보가 합작하면 설령 대선에선 이길지 몰라도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음이 이미 이 정권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일찍이 우리 정당사에 전례가 없는 盧·鄭 단일화 합의는 추진방법에서도 문제가 있다. 우선 국민경선이라는 소속 정당의 결정을 백지로 돌리고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자기 부정·자기 비하다. 이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선거 60일 전에는 후보나 정당이 관여된 여론조사를 금지하고 있는 선거법에 어긋날 소지도 있다.

선거법은 TV 대담·토론을 장려하고 있으나 공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특정 두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지상파 TV방송이 3∼4회씩이나 집중 방영을 한다면 그것 자체가 특정 후보를 띄우기 위한 선거운동이 아니냐는 게 상식적 판단이다. 엊그제 TV의 정당 방송연설에 나온 盧후보가 특정 후보 비난만 늘어놓은 경우에서 보듯 일단 방송된 내용과 파급효과를 되돌릴 방도는 없다. 盧·鄭측은 이를 노리는지 모르나 낡은 정치 틀을 깨겠다면서 위법 시비가 따를 결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재고할 대목이다. 선관위나 방송사도 혼탁·비방사태 예방을 위해 적극 대응해야 할 것이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는 시점에서 그 정당성과 합리성을 따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발생을 막자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명분과 방법을 다듬어 당장의 위법시비는 물론 정치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을 피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