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여행기'작가의 엽기적 정치풍자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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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이번엔 진귀한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시인이나 학자의 유일한 소설이라든가, 필화를 일으켰다든가 해서 역사적 의미-좀 거창하게 들리는군요-를 곁들인 책들이 있습니다. 걸리버여행기를 쓴 스위프트의 이 산문집도 그런 경우입니다.

『걸리버여행기』(문학동네, 해누리 펴냄)라면 모두들 "아, 그거"하실 겁니다. 소인국·거인국 등을 여행하며 겪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아동문학전집의 단골물이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스위프트가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쓴 소설이란 사실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스위프트가 "가난한 집 한살배기 어린이들을 부자 지주들용 식품으로 만들어 팔고 수출도 하자"는 요지의 글을 발표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은 문제의 글 전문과 주인을 골탕먹이는 법을 다룬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 두 편이 실린 산문집입니다.

'빈한한 가정의 자녀들이…'란 긴 제목의 글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매년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어린이 12만명 중 2만명은 '번식용'으로 남겨두고 10만명은 상류인사나 자산가들에게 식용으로 제공하자고 제안합니다. 한살 때까지는 엄마 젖만으로 살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부모와 사회에 부담만 된다는 이유에서지요. 어린이는 궁핍한 삶을 살지 않아 좋고, 만인의 식생활에 기여하며 당시 유행하던 낙태·사생아 살인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젖살이 오른 한살배기는 영양분이 풍부한 건강식품이 된다든지, 가족이 조촐한 식사를 하려면 아이들 수족만으로도 적절하다는 등 끔찍한 이야기가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미친 사람의 엽기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18세기 풍자문학의 대가가 위정자들의 무능·부패로 인한 고국 아일랜드의 참상에 대해 느낀 진정한 아픔과 정의로운 분노를 담은 치열한 글입니다. "어린이 요리는 다소 값이 비싸므로 그 부모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시골지주들이나 먹을 수 있다"고 추천하거나 "실행에 옮길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없인 부재지주 중과세 등 다른 대안을 내놓지 말라"고 당부하는 데서 풍자의 과녁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모든 잘못은 애완견이나 최근 해고된 하인 탓으로 돌려라" 등이 언급된 '하인 지침'이나 이 글은 상쾌한 주말 아침에 허리띠 풀고 편안히 웃을 내용은 아닙니다. 쓴웃음을 자아내는 글이지요. 국민과 유리된 이른바 대권 다툼을 보며 문득 떠올랐기에 골라봤습니다.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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