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수 미달 법안 재처리 결정 여론 뭇매에 정치권 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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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가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통과시킨 법안들을 재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은 거센 비난 여론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의 내용이 잘못돼 재처리(飜案·번안)된 사례는 수차례 있었지만 정족수가 미달됐다는 이유로 재처리되기는 처음이다.

정족수 미달 법안 처리가 알려진 뒤 시민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정족수가 미달된 법안은 무효'라는 주장이 거세게 일었지만 국회는 법안의 재처리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정치권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관용(朴寬用)국회의장도 전날까지 법안 재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앞으로 의결 정족수에 미달한 상태에서 의안을 처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본회의장'의 의미를 본회의장 주변으로 확대 해석해온 게 국회의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11일 오전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도부가 나서 '법안 재처리'를 촉구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총무단에 법안 재처리 의견을 피력했고, 민주당 조순형(趙舜衡)선대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원인무효인 법안의 재처리를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치고 나왔다.

여기엔 정치개혁법의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한 마당에 정치권이 법안 재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할 경우 정치 개혁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비난이 증폭되리란 두려움이 배어 있다.

朴의장은 11일 기자회견에서 "잘못된 국회의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고 국회를 새롭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안건 처리를 전자 투표로 하겠다는 朴의장의 약속이 지켜질 경우 국회 본회의장의 모습은 바뀔 수 있다는 평가다.

표결방식에 대해 현행 국회법 제112조는 전자 표결을 '원칙'으로 정했지만 의장이 이의(異意)여부를 물은 뒤 만장일치로 의안을 처리하는 방법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법안이 이 방식으로 처리돼 왔고, 때론 날치기 처리의 방법으로 악용돼온 게 사실이다.

전자 표결이 일반화될 경우 모든 법안에 대한 의원 개개인의 찬반의사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또 본회의장 안에 들어와 의석 앞에 있는 버튼을 눌러야 하기 때문에 회의장 주변 휴게실에 있는 의원까지 의결 정족수에 넣는 변칙이 사라질 수 있다.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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