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6. 필동 총격 사건(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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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63년께 찍은 가족사진. 큰아들 철승을 안고 있는 필자와 아내, 큰딸 선희.

1965년 새해를 나는 구치소에서 맞아야 했다. 조선일보 기자가 합의를 해줘야 풀려나는데 골탕을 먹이느라고 그러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멀리서 두부 장수의 종소리가 들리니 내 신세가 더 없이 처량했다. 아침에 아내가 특별 면회를 왔다. 명색이 가장인데 (양력) 설을 가족과 떨어져 갇혀 있는 모습을 보이자니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넷째 삼촌이 심장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한마디를 던졌다. 삼촌은 변호사여서 당시 내 사건을 맡고 있었다. "태원아, 철승이 어멈이 어제 봉변을 당했다." "예?" "떡국을 뒤집어썼대." 영문을 몰라 아내를 쳐다보니 벌써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전날 저녁 아내는 기자가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고 한다. 문안도 할 겸 원만하게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섣달 그믐날이라 떡국을 끓이고 깨끗한 옷을 꺼내입은 뒤 집을 나섰다고 한다. 침대에 누운 채 일어나 보지도 않는 기자에게 떡국 그릇을 받쳐들고 다가갔다. "저, 아이들 아빠 일로 찾아왔습니다." "뭐라고요?" "저, 이태원씨…."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그릇을 걷어차 버렸다. 다행히 떡국이 뜨겁지 않아 다친 곳은 없었다. 그 얘기를 듣는 내 속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 만나 별일을 다 겪는구나.' 볼 낯이 없고 몸 둘 바를 몰랐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나를 만난 아내는 셋째 아이를 가질 때까지 교단에 섰다. 변변한 직업도, 배운 것도 없고 그저 명동을 떠돌던 한낱 건달과 왜 결혼할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그렇다고 내 행동거지가 다소곳한가. 자식이 셋이나 딸렸는데도 망나니처럼 주먹질이나 하고 신문에 오르내리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물론 나로서야 불가피하고 정당한 폭력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졌을 터이다. 지금도 40년 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내가 떡국을 뒤집어쓴 듯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아무튼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해 열흘 만인 1월 5일 공탁금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여담이지만, 당시 보석 적부심을 맡은 이가 나중에 국회의원과 총리를 지낸 이한동 부장판사였다. 이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재판 과정에서도 기자들이 어찌나 집요하게 쫓아다니던지. 심지어 보석 적부심 때도 너댓 명의 기자가 재판정을 어슬렁거리며 무언의 압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절대 기자는 건드리지 말자'는 교훈(?)을 얻었다.

수사 결과 강 사장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인물은 군납진흥회 회장인 김병학으로 밝혀졌다. 육사 8기로, 61년 5.16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과 동기였다. 첩보대 소령으로 근무하다 60년에 예편한 그는 육사 8기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안하무인 듯한 행세를 하고 다녔다. 군납진흥회란 강 사장과 내가 관여하고 있던 군납업자 친목회의 후신이었다. 강 사장은 회장, 나는 업무부장이었다. 친목회는 큰 돈을 굴리던 단체였다. 주한 미군 관련 공사를 따면 입찰가의 10%를 회비 명목으로 거둬들였던 것이다. 친목회라지만 사실은 공사 입찰을 담합하는 곳이었다. 건설회사끼리 싸워 입찰가가 너무 낮아지지 않도록 사전에 조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권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김병학이 우리를 내쫓고 자기 사람을 앉히면서 군납진흥회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이에 얽힌 사연은 내일 계속하겠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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