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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스트롱 Mr. 뷰티 일자리 성역을 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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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지난해 생긴 신조어 가운데 '낙바생'이란 게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어렵게 취업한 졸업 예정자를 뜻하는 말이다. '강의 노마드족(전공 과목 외에 토익.취업 강좌 등을 찾아다니는 학생)'이나 '토폐인(토익 폐인)' 등의 신조어도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취직하기가 이처럼 어렵다고 하지만 남녀 경계의 벽을 뛰어 넘는 역발상으로 취업에 성공한 이들이 있다. 남녀의 일자리는 무릇 따로 있게 마련이라는 사회의 고정 관념을 시원하게 깬 두 젊은이를 만났다.

*** 제약사 영업 유호정씨

술자리 대신 지식으로 무장… "자신감 있으면 여성이 유리"


"의사 선생님들과 함께 사우나를 갈 수 없는 게 좀 아쉽죠. 그것 말곤 남자 영업사원이 조금도 부럽지 않아요."

한국 화이자제약 영업부 유호정(27.여)씨. 대학원에서 생물학 석사까지 마친 그가 제약회사 영업직에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물론 주변에서 기겁을 하며 말렸다. 술자리가 잦은 데다 약을 많이 팔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하는 직업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는 남자 친구들은 "술 먹고 싶어 미쳤느냐"며 놀리기도 했다. 다들 말리니 오기가 발동했다. 성격이 활달했던 그는 사람 대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팀장-인사부-부사장까지 3차에 걸친 면접이 간단치 않았다. 업계 상황에 대해 술술 말하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유씨는 기초 지식조차 없었다. 그러나 자신감으로 밀어붙였다. "대학원에서 공부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영업을 하겠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엔 "공부만 했기에 배우는 건 자신이 있다. 앞으로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겠다"며 맞받아쳤다.

외국계 회사여서인지 영업 방식이 듣던 것과 달랐다. 술접대는 거의 없었다. 대신 의약 성분,최근 학계 소식 등 정보를 제공해 의사의 신뢰를 쌓으라고 가르쳤다. 영업 첫날 병원에서 만난 한 의사는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이름을 묻자 이 의사는 "두 번 볼 일 없을텐데 뭐하러 묻느냐"며 핀잔만 줬다. "저 사람에게 얘기하라"고 해 명함을 건네니 컴퓨터 수리공이었다.그럴수록 더 독하게 마음먹었다. 아침에 샌드위치를 들고 찾아가 인사하고 주말에는 학회 행사까지 따라갔다.

여성이어서 오히려 유리한 면도 하나 둘 보였다. 얼굴을 익힌 교수들은 별 거부감 없이 맞아 주고 "여성이라 그런지 조목조목 설명도 잘한다"며 칭찬까지 했다. "아직도 제약 업계 영업직에는 남성 중심의 문화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감만 가진다면 여성이 더 유리한 분야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여자 후배에게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 화장품 판매 박기연씨

정보통신 전공에 해병대 출신… 탁월한 마사지 실력으로 인기

"고객님은 각질이 많이 생기는 편이니 이를 관리할 화이트닝 제품을 쓰시는 게 좋겠네요. 팩을 쓰시려면 필오프 타입의 이 제품이 괜찮습니다." ㈜태평양이 운영하는 서울 신사동 '디아모레 갤러리'의 청일점 박기연(26)씨. 지난해 9월 입사한 초보 판매원이지만 화장품에 대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박씨가 원래부터 이런 쪽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포항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그의 전공은 정보통신학. 군대는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알아보다 친척이 운영하는 미장원에서 일을 도왔고, 그러면서 손님들에게 "감각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 지난해 ㈜태평양에서 일하던 친구가 메이크업 일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감각을 살려 '헤어 디자인 실력을 겸비한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도전해 보라는 것. 왠지 틈새 시장에서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 곧바로 지원했다. 업체 측에서도 이런 도전을 받아들여 그를 채용했다.

그러나 여성 고객을 대하는 일이 쉽진 않았다. 민감함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손님들은 여자 직원만 찾았다. 박씨는 그럴수록 오히려 적극적으로 손님을 찾아 나섰다. 누구보다 먼저 살갑게 인사하고 한번 왔던 고객은 기억해 뒀다가 아는 척했다. 화장이 어색한 손님에겐 "이렇게 하는 게 남자들이 좋아하는 화장법"이라며 조심스레 귀띔하기도 했다. 쉬는 날은 본사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찾아가 꾸준히 화장법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장기는 '손 마사지'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남 신세계백화점 아모레퍼시픽 매장에서 열린 무료 손 마사지 행사에 파견 나갔다가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 고객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매일 밤 8시까지 사람들을 대하는 업무가 고되지만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즐겁다는 박씨.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글=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hyundong30@joongang.co.kr>.
최승식 기자<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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