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1년 뒤 꼭 다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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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청와대가 서울보증보험 사장에 특정인을 앉히려고 했다. 정연길 현 서울보증보험 감사다. MB와 같은 동지상고 출신이다. 6월에 1차 공모를 했는데 일이 꼬여 어렵게 됐다. ‘금융계 MB 인맥 심기’ ‘선진국민연대의 금융 인사 농단’ 등이 불거지면서다. 그러자 꼼수를 냈다. 1차는 무산시키고 2차 사장 공모를 하면서 규정과 절차를 멋대로 바꿨다. 결선에도 못 올라간 후보를 뽑은 데다 3년인 사장 임기도 1년으로 줄였다. 1년 뒤 다시 사장을 공모해 정 감사를 앉히기 위해서다. 2008년 6월 선임된 정 감사의 임기는 딱 1년 남았다’.

에이 설마. 요즘 시대에 어떤 권력이 대놓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몇 군데 수소문을 해봤다. 예상대로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터무니없는 소설”이라며 펄쩍 뛰었다. 서울보증보험 측도 “적법한 규정과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다른 후보들이 모두 흠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현 방영민 사장을 유임시킨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금융가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음모설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 이유도 꽤 됐다. 우선 방 사장의 연임 기간이다. 하필 왜 1년 일까. 이 회사 정관의 사장 임기는 3년이다. 1년만 유임시키려면 정관을 고쳐야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 적임자가 없어 현 사장을 유임시켰다면 3년으로 하는 게 맞다. 연임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미 초대 박해춘 사장이 연임한 전력이 있다.

둘째, 방 사장의 ‘어색한’ 등장이다. 방 사장은 1차 공모 때 탈락했다. 1차 공모에서 떨어진 이들 중 2차 공모에 나선 이는 방 사장뿐이다. 그는 응모 전부터 사석에서 “1년만 더 사장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이들은 “하필 왜 1년일까 궁금했지만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셋째, 예금보험공사는 결과를 미리 알았다. 2차 사장 공모 발표일인 지난 5일. 당시 사장추천위원회(이하 사추위)는 3명의 최종 후보를 놓고 저울질이 한창이었다. 방 사장은 3명의 최종 후보 명단에 없었다. 그런데 예보 측을 통해 난데없이 “사추위가 방 사장의 1년 연임으로 결론을 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사추위 측은 즉각 “결정된 바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예보 측은 “그럴 것 같다는 얘기일 뿐”이라며 한 발 뺐다. 사추위는 갑론을박 끝에 이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날인 6일에야 회의를 다시 열고 방 사장의 1년 연임을 ‘통과’시켰다. 이미 탈락시킨 인사를 사추위가 다시 살려내고, 그것도 모자라 1년만 연임시킬 줄 예보 측은 어떻게 하루 전에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었을까. 미리 짜인 각본이 없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금융계엔 불문율이 있다. 청와대가 침 발라놓은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거다. 눈치 없이 나댔다간 화를 입기 십상이라서다. 좌·우를 떠나 역대 정권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런데도 이번 서울보증 사장 2차 공모엔 16명이 몰렸다. 공모에 참여한 한 인사는 “이번엔 정말 투명하게 하는 줄 알았다”며 “결과를 보고 나니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왕 공모를 하려면 거울처럼 투명하게 하거나,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자기 사람을 골라 임명장을 주는 게 낫다. 어설픈 구색 갖추기용 공모는 음모설을 부추기고 불신만 키울 뿐이다. 게다가 서울보증은 정부가 98%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다. 정부 맘대로 사장을 고른들 누가 뭐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는 “시나리오는 없었다”며 “1년 뒤 공모를 보면 알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1년 뒤 서울보증 사장 공모를 꼭 지켜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