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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진주만'에 뜨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8면

선명한 햇볕, 쪽빛바다,

야자수 행렬과 끝없는 모래밭-.

하와이는 우리에게 전형적인

이국풍의 관광지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와이는 화려한

쇼 윈도 같은 곳만은 아니다.

20세기 초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나라를 등지고 생존을

위해 다다랐던 곳.

흙도 바람도 말도 다른 이 섬에서

조선 남자들은 사탕수수 노동자로

'아메리칸 드림'의 첫 삽을 떴다.

내년이면 이민 1백주년을 맞는 하와이 교포들은 이제 5세대를 거치면서 현지 사회을 이끄는 주역으로 우뚝 섰다.

지난 1일 개막한 제22회 하와이 영화제는 이들의 공로에 답하듯 올해 영화제의 초점을 한국영화에 맞췄다. 개막작을 'YMCA 야구단'으로 정해 이같은 의지를 분명히 했고, 이밖에도 17편의 한국영화가 초대됐다. '한국영화의 진주만 공습'이라 할 만했다.

지난 2일엔 이민 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미국의 톰 코프먼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아리랑:코리안 아메리칸의 여정'도 소개됐다.

또 역대 하와이 영화제에서 골든 마일레(최우수 작품상)를 수상한 한국 영화 네편도 재상영됐다. 네작품은 '개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감독)'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감독)'춘향뎐'(임권택 감독)'아름다운 시절'(이광모 감독)이다.

호놀룰루 해변에 자리한 와이키키극장에서 영화제의 테이프를 끊은 'YMCA 야구단'은 7백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부터 열띤 반응을 얻었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로저 이버트는 "많은 할리우드 스포츠 영화가 화려한 경기 모습을 담는 데 주력해 비교적 주제가 단순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역사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다. 디테일이 살아있고 이야기 전개도 훌륭하다"고 평했다.

그는 "요즘 한국 영화의 기세를 보면 1970년대 독일 감독 빔 벤더스를 주축으로 한 뉴 저먼 시네마의 융성기를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가 처음이라는 카렌 윌킨슨(40·회사원)은 "웃기면서도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이제 한국 영화를 찾아서 보겠다"고 했다. 이밖에도 많은 하와이언들이 "DVD는 언제 살 수 있느냐""진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냐"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개막작 상영에 맞춰 호놀룰루를 찾은 주연 배우 송강호씨는 영화 상영 후 현지 언론인과 관객들로부터 "천재적인 배우"라는 찬사를 수차례 받았다.

특히 그의 표정 연기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00년 초 야구가 우리 땅에 들어온 당시를 이야기한 것이라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의외였다.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열기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2일 오후 호놀룰루 돌 캐너리 극장에서 선보인 국내 미개봉작 '동승'(감독 주경중)이 특히 큰 관심을 모았다. 영화제 넷팩부분 경쟁작으로 올라 있는 이 영화는 번민하는 동자승 이야기를 다뤘다.

2백석 규모의 영화관을 채운 하와이 관객들은 관람 중 눈물을 보이기도 했으며 20여명의 '열혈'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극장에 남아 감독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한편 이날 오후 호놀룰루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는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릭 윤, 그레그 박, 97년 미스 유니버스 브룩 리 등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연예계 경험'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또 3일에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 박종원·이은 감독,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로듀서 아이린 조 등이 '한국 영화의 동향'이란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올해 하와이 영화제에는 세계 각국의 영화 2백20여편(장·단편 포함)이 출품됐으며, 한국 영화로는 'YMCA…'외에 '무사''취화선''후아유''봄날은 간다''피도 눈물도 없이' 등이 하와이 관객에게 선보였다.

호놀룰루=신용호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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