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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의아름다운키스:새영화>"난 네가 딱이야" 그녀들끼리의 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1면

"친절하고 재치 있고 똑똑하고 진보적인데…, 왜 하필 여자냔 말이야."

남성우월주의자의 발언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허송하다 '나머지 반쪽'을 발견한 여성의 탄식이라면? 8일 개봉하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진실한 사랑과 안정적인 관계를 갈구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담아낸 로맨틱 코미디다.

주인공 제시카(제니퍼 웨스트펠트)는 심각한 완벽주의자다. 만나는 남자마다 눈에 차지 않아 불만족스럽게 헤어져야 했던 그녀에게 어느 날 딱 맞는 상대가 나타난다.

신문 광고를 통해 솔직하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솔 메이트(Soul Mate·영혼의 짝)'를 만난 것. 제시카는 상대가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릴케의 시구를 인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광고에 적힌 전화번호로 즉시 연락한다.

문제는 그 상대인 헬렌(헤더 예르겐슨)이 여자라는 점. 화랑 큐레이터인 헬렌은 한술 더 떠 양성애자이기까지 하다. '유대인 결벽녀'로 묘사되는 제시카는 헬렌의 대담함에 이끌리지만 육체적 결합이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그녀와 곧 충돌하게 된다.

제시카는 마치 '여자 우디 앨런'을 보는 듯하다. 소심하고 늘 주저주저하는, 대사량이 무척 많은 유대인 캐릭터 말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영화 전체가 어딘지 '앨런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뉴요커들의 바쁜 일상과 섬세한 심리 묘사가 교차되며, 그 위에 부드럽고도 경쾌한 새러 본·다이애너 크롤 등의 재즈 음악이 등장 인물들을 풍성하게 감싸안는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뺨치는, 탁구공을 주고 받는 듯한 재치 있는 대화도 한몫 거든다. 레스비언·게이·양성애자 등 성(性) 정체성을 심각하게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데도 큰 부담이 없다.

동성애라는 틀을 빌려오되 인간 관계의 본질에 천착한 점, 그래서 보편성을 획득한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취한 영리한 전략이다.

제시카와 헬렌의 관계는 많은 여성 관객의 공감을 얻을 것 같다. 동성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늘 이성교제에서 어딘지 허전하고 거칠고 가슴에 와닿지 않는 허기를 느꼈던 수많은 그녀들에게. 이 영화는 두 여성의 디테일한 대화를 통해 등장 인물들의 공감을 스크린 밖으로까지 끌어내온다. 가령 이런 식이다. 헬렌의 입술 색깔에 감탄한 제시카가 묻는다.

"그 립스틱 무슨 색이죠?"

"먼저 맥 비바글램 3호를 바르고, 프리스크립티브스 푸들을 덧발라요. 그리고 나서 수퍼내추럴 누드로 마무리하면 되죠."

"아, 그 제품. 나도 알아요. 아주 촉촉해요."

또 하나. 동거하게 된 두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 헬렌이 갑자기 "오, 드라이클리닝 맡긴 옷 찾는 걸 또 잊었네"하고 소리지른다. 곧 "내가 아까 찾아다 놨어"하는 제시카의 대답이 돌아온다. 사소하지만, 안도하는 헬렌의 표정에서 여성이 연인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적확한 통찰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올초 미국 여섯개 도시에서 개봉했다가 3주 만에 전역으로 스크린을 늘렸다. 불과 1백만달러(약 13억원)를 들인 저예산 영화인 데다 로맨틱 코미디라면 으레 갖춰야할 스타 캐스팅도 없지만 튼실한 짜임새의 각본 덕에 열 블록버스터 안 부럽게 됐다. 국내에서도 CGV강변·메가박스·시네코아 등 5개 관에서 먼저 개봉한다.

주연·각본·제작을 맡은 웨스트펠트와 예르겐슨은 원래 이 작품을 희곡으로 써 연극 무대에 올렸다. 상투적이지 않은 결말도 상큼한 뒷맛을 남긴다. 비정상적인 소재에 매달려 이야기의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최근 한국영화가 참고할 만한 작품이다. 감독 찰스 허먼 윔펠드. 18세 이상 관람가. 원제 Kissing Jessica Stein.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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