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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문닫을 때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후보마다 정치 개혁의 공약을 화려하게 내놓고 있다. 그 중 공통적인 것 하나는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고 국회를 활성화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회 운영이나 후보진영의 움직임을 보면, 이 약속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고 다음 정부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가 계속되리라는 우울한 예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당권과 대권이 분리되고 그에 따라 대통령과 국회가 상호 견제와 대등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선거운동 단계에서부터 의회와 후보 진영이 분리돼야 한다. 케네디 선거운동본부의 핵심 인사 16명 중 베일리만이 코네티컷주 민주당 위원장이었고, 그 외에는 현역 의원은 물론 민주당 관계자가 한명도 없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의원들은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한발짝 비켜나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한다. 그리고 선거 결과 자기 정당의 후보가 승리해도 의원으로서 대통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의원들은 세비는 국민에게서 받으면서도 국민 대표로서의 역할은 내팽개치고 저급한 선거운동원으로서 충성 경쟁을 하고 있다. 면책특권을 무기로 민생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상대 후보에 대한 의혹 제기로 핏대를 올리며 고성과 욕설을 나누는 것도 모자라 아예 예년보다 한달 이상 일찍 국회의 문을 걸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서겠다고 한다.

정기국회의 사실상 폐회를 일주일 앞둔 오늘까지 개최된 본회의 일수는 38일, 앞으로 일주일 내내 본회의를 연다고 해도 50일을 채우기 어렵다. 상설 국회를 규정하고 있는 국회법을 무색하게 하는 것은 물론 미국·영국·캐나다 등의 의회가 연간 1백50일 정도 본회의를 여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치다.

본회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한심하다. 좋게 보아도 '대표 띄우기' 이상의 의미가 없는 대표 연설과, 각종 풍(風)과 설(說)과 의혹이 난무하는 대정부 질문에 시간의 대부분을 허비했고 법안을 심의한 것은 며칠 되지도 않는다. 후반기 국회에 들어 통과된 법률은 총 31건. 이중 한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30건은 7월 31일 하루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주 또 한번의 무더기 통과가 예견되고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몇달씩 청문회를 열어 준비한 법안에 대해서도 본회의에서 수십건의 수정안이 붙고 그에 대해 일일이 수십회의 기록 표결을 하는 외국의 의회와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우리 국회의 현주소다.

예산 심의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불황의 경보가 여기저기에서 울려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선거용 선심성 예산 심의로 일괄하고 있다. 이렇게 의원을 저급한 선거운동원으로 전락시켜 국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어렵게 하는 후보와 정당이 약속하는 당·정 분리와 의회 활성화 공약을 국민이 어떻게 믿겠는가. 이제 각 후보는 자신의 공약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의원들을 대선에 내모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동시에 의원들 역시 자기 당 소속 후보와 당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국회의 문을 닫고 선거구에 내려가 경쟁적으로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매터도(흑색선전)를 유포하는 대신 차분히 국회에서 다음 정부가 지난 정부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제도적인 정비를 해야 한다. 또 대선 자금에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그리고 불법 대선 자금을 핑계로 야당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하지 않도록 정치자금법을 포함한 정치 관계법을 개정해야 한다.

아울러 다음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부적절한 인사로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정권 인수팀에 예산을 지원하고 국가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음 정부 출범 초부터 위헌적인 국가 운영을 하지 않도록 총리의 인사청문회를 대통령 취임 이전에 할 수 있도록 법을 정비해야 한다. 또 다음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결과적으로 대통령까지 불행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반부패 입법에 나서야 한다. 할 일이 너무 많은 국회다. 문을 닫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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