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자유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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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Labour ought to be free). "

1819년 영국 의회에 최초의 아동노동 규제법이 제출됐을 때 그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국회의원들이 외친 구호다. 당시 5~6세부터 시작하여 휴일도 없이 매일 12~16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던 수백만명의 영국 어린이 입장에서는 기가 찬 말이었다. 이 법의 규제 대상은 먼지 때문에 특히 건강에 해롭다고 인정된 면직물 공장에 국한돼 있었고, 내용도 9세 이하 어린이의 고용을 금지하고 13세 이하 어린이들의 노동시간을 8시간 이하로 규제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어린이 노동자들의 자유를 핑계로 최소한의 규제마저 반대했으니 말이다.

*** 고전적 자유파, 민주주의도 반대

그러나 이는 사유재산권 행사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핵심적 가치로 여기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아동 노동의 규제는 공장주가 자신의 재산인 기계를 사용할 자유뿐만 아니라 (아동) 노동자가 자신의 재산인 노동력을 사용할 자유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규제뿐이 아니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유재산권의 자유를 해친다는 이유로 소득세는 물론 중앙은행의 설립마저 반대했다. 민주주의도 반대했다. 판단력이 부족한 여성이나 유색인종, 그리고 특히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소득세와 시장규제를 통해 사유재산권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19세기 말까지 프랑스(1848년) 외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여성투표권은 뉴질랜드(1907년), 영국(28년) 등 5~6개국을 제외하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주어졌다(스위스는 71년).

20세기 들어서면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대공황이 났는데도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을 기다리다가 결국 케인스적 개입주의에 정책 주도권을 빼앗겼다. 산업화로 사회 갈등은 늘어가고 참정권은 계속 확대되는데도 복지국가 수립이나 노동조건의 규제에 반대하다가 정치적 기반도 잃었다.

2차 대전 이후 모든 서구 국가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급 타협과 혼합경제를 표방하면서 70년대까지 자유주의의 쇠락은 계속된다. 우파의 주도권은 영국 보수당의 민족통합주의자들(소위 One-Nation Conservatives)이나 유럽 대륙의 기독교 민주당들과 같이 사회통합과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비자유주의적 우파로 넘어갔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기치하에 자유주의 세력은 부활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이른바 '뉴 라이트'가 등장하여 자유주의를 우리 사회의 주도적 이념으로 확립하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과 범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신자유주의를 통해 자유주의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양보를 많이 해야 했다. 경제적으로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고 사유재산권에 대한 제약을 받아들여 소득세, 중앙은행, 그리고 일부 정부의 규제를 수용했다. 정치적으로는 남녀.인종.빈부를 불문하고 전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인정했다. 특히 자유주의 전통이 약한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자들은 영.미계 나라들에서보다 훨씬 광범한 사유재산권에 대한 제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 신자유주의자들 양보 불가피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잔인하고 근시안적인 19세기식 고전적 자유주의를 원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정치에서 긍정적인 세력이 되려면 정확히 어떠한 영역에서 사유재산권에 대한 제약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명확한 내용 규정 없는 자유주의는 무책임한 사유재산권 행사를 부추겨 사회 통합을 해치고 적절한 정부 개입을 방해하여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경제학

◆ 약력=1963년 서울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 저서:'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영문),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