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떨고 있는 미국' TV선 종일 수사물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9면

잡히지 않는 공포의 스나이퍼(저격수), 핵, 무역적자,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미국에서 이처럼 낯선 단어들과 만나며 '위험하게 살기'가 한달째다.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찾았을 때 일이다. 리버티 섬으로 가는 배를 타는 맨해튼 남쪽 배터리 공원은 9·11 테러 사건으로 '그라운드 제로'가 된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근처에 있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 보여 전망이 훌륭한 배터리 공원 주변엔 고급 아파트들이 몰려 있기도 한데 무너진 쌍둥이 빌딩 때문인지 '분양 중'이라는 플래카드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매표소는 비가 오는데도 붐빈다. 배를 타려는데 공항에서 보다 더한 검문 검색에 무척 당황했다. 가방은 물론이고 점퍼, 모자 심지어 허리띠까지 모두 벗고 엑스레이 촬영하듯 검색대를 지나야 했다. 세계 도처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테러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는 자유의 여신상이 그날 따라 더욱 심각한 표정이다.

현실이 이러니 미국의 요즘 TV 방송은 잿빛 도심, 온기 없는 맨해튼과 비슷하다. CNN에선 거의 종일 저격수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NBC·CBS·ABC 등 지상파 방송의 저녁 프라임 시간대는 온통 범죄 수사물들이 점령하고 있다.

지난주 뉴욕 극장가에선 영화 '양들의 침묵''한니발'의 속편인 '레드 드래곤'을 밀어내고 공포영화 '링'이 주말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했다. '링'은 스즈키 고지 원작의 기분 나쁜 일본 공포물인데, 이번 작품은 미국에서 리메이크됐다. 요즘 미국 분위기는 이렇다.

이런 와중에 NBC는 범죄수사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프로그램인'법과 질서(Law & Order)'와 '제3의 눈(Third Watch)'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붐타운(Boomtown)'이라는 수사물을 새로 편성했다.

이는 이미 범죄수사물로 인기전선을 구축한 CBS와 승부를 겨루겠다는 자세다. CBS는 한국에서 'CSI 과학수사대'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은 '범죄수사대 (CSI-Crime Scene Investigation)와 'CSI:마이애미'와 '강력반(Robbery Homicide Division)'으로 프라임 타임을 장식하고 있다. ABC 또한 여전히 '뉴욕 경찰 24시(N.Y.P.D.Blue)를 대표 프로그램으로 방영하고 있다.

이같은 범죄수사물의 홍수 현상은 지난주 시청률 1위를 지키며 공전의 히트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범죄수사대(CSI)'에서 비롯됐다.

주요 방송사 중 가장 많은 범죄수사물을 프라임 시간대에 집중 편성한 CBS의 중견 프로듀서는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고려된 정책은 아니다"라고 밝히면서도 "봄 개편에서 선보이려고 준비 중인 범죄수사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방송사들이 흥행이 보장되는 '스매시 히트(smash hit)' 프로그램에 매달리는 현상은 세계 공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잉 편성된 범죄 관련 프로그램들이 오히려 범죄 유발의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과거 흥행 보장 상품이던 '정의로운 보안관과 멋진 카우보이'에 대한 향수가 세기를 바꿔 범죄수사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에 빛나는 홍콩 누아르의 우위썬(吳宇森)감독이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자기복제를 하면서도 상품가치를 잃지 않는 것 또한 이러한 미국적 흥행코드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 마치 거대한 텔레비전 범죄수사물 세트장에 살고 있는 듯 온몸이 긴장된다.

neoyi@mbc.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