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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힘 네트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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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나는 '한국 재벌의 지분소유 네트워크'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의 주전공인 만큼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초청의 주체가 서울대 물리학부 쪽이었다. "재벌에 대해 관심을 갖는 물리학자들이라니…." 얼핏 아이러니로 보이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네트워크는 21세기의 과학을 규정짓는 키워드다.

이제 네트워크는 물리학자와 사회학자 사이의 네트워킹이라는, 20세기 분과학문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을 아주 자연스런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물리학이냐 사회학이냐의 분과학문간 벽쯤이야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네트워크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링크』(원제 Linked-The New Science of Network)는 네트워크를 통해 21세기 과학에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쉬운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scale-free network)'라는 이론적 무기로 무장한 채 물리학·사회학·경제학·신경제에서 에이즈, 아시아 경제위기,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직 등을 넘나들며 네트워크 과학을 쉽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중앙통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인터넷이 왜 무질서의 혼돈에 빠지지 않고 유지되는지, 에이즈 바이러스의 소멸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을 하나의 이론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가능한 비결은 '척도 없는 네트워크'를 규정하는 멱함수에 있다. 소수의 개체(허브)와 많은 개체들 사이의 공존관계를 재는 멱함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요소들간의 연결이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며 복잡해 보이는 네트워크 배후에 있는 숨은 법칙이 구조적 안정성과 외부 공격에 대한 저항력 등을 결정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네트워크가 멱함수 법칙을 따르는 순간 우리는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전이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사회과학에도 충격으로 다가올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본다.

홉스와 루소 이후 '질서의 문제'는 어차피 사회과학 최대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경제학은 시장균형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려 했고, 사회학은 미시-거시 연계분석이라는 관심 하에서 개인들의 자원적 행위가 어떻게 구조적 차원의 질서로 이어지는지를 밝혀줄 규칙을 찾는데 골몰해왔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 이론'은 사회과학자에게도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자인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는 1967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태생. 현재 노트르담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옮긴이 강병남은 바라바시와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이고, 또 다른 역자인 김기훈은 경제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후 네트워크분석 전문기업을 창업해 국내 최초로 네트워크분석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바 있다.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에서 네트워크라는 공통분모로 뭉친 두 사람의 호흡은 상당히 좋은 번역을 만들어냈다.

바라바시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공동연구자인 KAIST 물리학과의 정하웅 교수 이야기가 수십 번씩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왠지 흐뭇해하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고급스런 지적인 즐거움에 더해진 보너스라고 해두자. 물리학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난해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적 호기심을 가진 독자라면 그 흥미로운 땅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업 내의 조직네트워크, 시장에서의 고객네트워크, 기업간 협력네트워크 등에 대해 전혀 새로운 안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네트워크 시대를 리드하고자 하는 최고경영자들이라면 꼭 읽어볼 책으로 권하고 싶다.

장덕진 교수 <서울대·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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